믿음과 행함 사이 8 약2:18-26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2025.07.04 10:46
예수인교회
믿음과 행함 사이 약2:18-26 당신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찬 302/통 406 내주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을까요?
18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야고보는 본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믿음만 있고 행함이 없는 당신이여 당신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이 질문을 잘 못 오해하면 행함과 믿음을 분리해서 질문하는 것 같지만 야고보의 의도는 “믿음과 행함”은 같이 가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결국 행함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이걸 좀더 쉽게 연인사이로 비유하면, 남자가 자꾸 밥살때마다 아까워하고, 집 바래다 줄때 힘들어하고, 자기 바쁠때 맘대로 약속을 어기고, 전화통화도 귀찮아 합니다. 그럼 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는 걸까요? 아니라고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왜죠? 사랑하지 않는게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말 믿는다면 그사람의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보여진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2절에 설명하는데
19절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그대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하나님 한분이심을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믿음도 괜찮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그리스, 터키와 이탈리아에 등지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님만을 유일신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지식적으로 하나님이 천지와 인간을 만드신 창조자인걸 분명히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런 믿음은 귀신도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믿음이 있는데 “떨었다“고 표현합니다. 왜냐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지적 동의의 믿음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순종이 수반된 믿음을 갖을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게 없으면 하나님은 단순히 죄를 심판하는 두려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런 지적 동의만 믿는 사람을 18절에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20절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여기서 어리석다는 표현은 “공허함, 또는 속이 비었다”는 표현으로 “허공을 치는 신앙생활” 또는 바리새인처럼 회칠한 무덤같은 신앙이라는 의미 입니다. 그리고 “쓸모가 없다”는 표현은 곡식이 없는 땅, 또는 노예가 일하지 않아서 소득이 없는 걸 말합니다. 즉 희생과 수고를 하지 않는 궁핍하고 빈약한 믿음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에 대해 21절에서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아브라함을 비유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한번 더 표현합니다.
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중요한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약 130세 전후반으로 말씀에 순종하기 어려운 나이인데다가, 몇십년을 기다려 얻은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죽이라니 어떻게 순종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제단에 바쳤는데 21절에 “바치고서”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멈추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그대로 죽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의롭다고 칭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죽이는 척만 합니다. 헌신하는 척만 합니다. 순종하는 척만 합니다. 언제까지? 하나님이 이삭을 살려줄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고 진짜 죽을 것 같을때 우린 시험에 듭니다. 이걸 “거래적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 이삭을 죽일 수 있는 믿음이 있었을까요? 히브리기자는 히11:17-19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이 “내 자손은 이삭을 통해서 나오리라 한 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이 죽은자도 다시 살려서 반드시 약속을 지킬거란 믿음을 가졌다”는 말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확신이 우리의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22절에서 정리합니다.
22절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즉 신실한 삶의 행함은 확실한 믿음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23절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는 다시 창15:6 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인정한 믿음은 말로만의 믿음이 아닌 행함이 수반된 믿음이었다는 걸 강조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은 그를 벗, 친구라고 불렀답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요15:15절에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은 제자들에게도 이제부터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부른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즉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주님은 더 깊이 친밀하게 말씀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걸 말합니다.
24절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는데로” 이것은 결론이란 의미입니다 전체적인 결론은 “사람이 의로워지는것은 행함입니다.”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똑같은 말입니다. 바울의 의로움이란 “행함이 포함된 믿음”인데. 가령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속에는 사자밥이 되더라도 로마황제가 아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행함이 포함된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의로움이란 믿음을 기초로 한 행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수있는 행동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위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둘다 같은 “보여지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는 한가지 예를 더 추가합니다. 25절에 창녀라합의 이야기입니다. .
25절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왜 라합의 예를 추가했을까요? 칼빈은 이부분에 대해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우상이라면, 창녀라합은 경멸의 대상인 이방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누구라도 이런 믿음을 가질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것입니다.
26절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한번 더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처럼 행함으로 보여지지 않는 믿음은 죽은거라고 마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야고보는 묻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이말은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첫째 지식적인 말만 아니라 주님을 사랑한다는 행동을 보여주십시오.
둘째 거래적 믿음이 아니라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셋째 항상 행함을 염두해 둔 믿음을 갖으십시오.
오늘도 이 믿음으로 가정과 일터와 세상에서 주님을 보여주는 믿음의 증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