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새2 마 23:37-38 무엇을 탄식하십니까?
2025.04.15 07:20
예수인교회
고난주간 특새 2 마 23:37-38 무엇을 탄식하십니까? 찬 510/통276 하나님의 진리등대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청소하신 후 이것에 못마땅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다양한 질문과 공격이 가해졌습니다.(21-22장) 이것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의 말씀이 선포되는 장이 바로 마태복음 23장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것은 현대 그리스도인과 그 교회를 향한 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둘째날을 맞아 예수님의 탄식을 통해 우리가 정말 탄식해야 할 탄식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이들의 “높아지려는 모습을 탄식했습니다.” 1-12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23:21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이들의 당시 영적 지도자들이었다는 의미와 동시에 스스로 높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꼬집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5절에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경문곽은 말씀을 넣고 다니는 옷깃의 주머니 통 같은 것인데 그 사이즈가 클수록 말씀을 많이 본다는 걸 상징해서 하나님께 충성되다고 보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앉을때 마다 상석에 앉기를 즐겨했고 7-10 이들에게 영광스런 호칭이 있었는데 “랍비/아버지/지도자”란 호칭인데 이것 듣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건 사실 우리의 모습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높아지는 것에 익숙합니다. 심지어는 낮아지는 “섬김이나 봉사”도 사실 높아지기 위해 합니다. 어느 교회에 주차봉사하던 안수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근데 어느날 새로 오신 성도님과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순서대로 차량을 주차하라고 지시했는데 새신자가 말을 듣지 않고 아무곳이나 댄 것입니다. 이때 집사님이 큰소리로 야단치자 이 성도가 “뭐 이런곳이 다 있어” 하며 이 집사님에게 욕을 하고 가려고 하자, 이 집사님이 화를 내면서 “나를 뭘로 보고 욕을 해” 하며 멱살을 잡은 것입니다. 물론 잘 잘못을 따져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봉사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세상은 삼각형의 권위 구조로 지도자들이 높임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역삼각형의 구조로 오히려 지도자들이 낮은 자들을 섬겨야 하는 구조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높아지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지 말고 낮아지지 못하는 것을 탄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딜가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둘째 이들의 “잘못된 맹세에 탄식했습니다.” 13-22
마23:1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너희만 못들어오면 되는데 다른 사람들까지도 못들어오게 한다고,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래서 16절에 눈먼 인도자라고 말하며 소경이 소경을 이끈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이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비판하는데 성전에 대한 맹세는 안지켜도 되고, 성전귀중품이나 제물에 맹세하면 반드시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보다 귀중품을 더 귀한게 생각한 것입니다. 잘못된 맹세입니다. 왜냐면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맹세를 금지합니다.(마5:33,약5:12) 왜냐 인간은 죄성을 갖고 있기에 하나님의 거룩함에 먹칠할까봐 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핸드폰 비즈니스를 하면서 이런저런 특약을 끼워 이익을 남기면서 소비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어느교회 장로야” 하나님의 이름을 판거죠. 우리의 크레딧, 신뢰는 어디서 나와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나 직분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그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목장에서 이런저런 심한 욕을 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저는 단번에 그 소문을 이렇게 막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럴분이 아닙니다.” 이 말 안에는 그분의 삶이 크레딧이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맹세가 필요 없어야 합니다. 왜죠? 우리의 삶이 크레딧이 되야 합니다. 가정에서 우리자녀들에게, 우리 부모님에게, 직장에서 동료들에게 동네 친구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 삶 자체가 크레딧이 되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그런 믿음의 가정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이들의 “겉과 속이 다른점을 탄식했습니다.” 23-28
마23:2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이 말은 당시 율법에 적힌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는 잘 바치면서 율법의 중심 마음인 “정의 자비 신의” 같은 것은 안 지킨다는 것이죠. 예를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보면 예루살렘을 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 피흘리는 이웃을 제사장과 레위인 등은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왜냐면 피를 묻히면 안되는 정결법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결법은 지키면서 이웃을 사랑하고 생명을 살려야 하는 건 무시한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외형적인 것만 지키고 내면은 엉망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킨다는 이스라엘의 격언을 썼는데 외면은 작은 하루살이라면 내면은 큰 낙타같이 더 크고 중요한데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28절에 “겉은 의로워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중적인 신앙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이중적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면?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부담 때문입니다. 교회 나온다고 갑자기 바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15장에 포도나무 비유로 알려주셨습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달려 양분을 먹으면 자연스럽게 열매가 맺혀집니다. 문제는 가지가 양분을 안먹으려고 하는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주간에 이것을 탄식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예수님의 나무에 양분을 먹으며 겉과 속이 같아지는 포도나무가 되시길 바랍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런 안타까운 예루살렘의 전체를 바라보시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이렇게 답답한 상황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그동안 보낸 선지자들을 오히려 죽였고, 결국 메시야 마저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어처구니 없는 무지한 예루살렘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그 가정 그리고 현대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정말 탄식해야 할 것을 탄식하지 않고 맨날 내앞에 엎드러지는 돈문제, 사람문제, 자식과 건강문제에 온통 정신이 빼앗겨 탄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죽어가는 것에 탄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것은 이런 불쌍한 우리를 위해서 자꾸 사람을 붙여주거나 예배로 초청하고 말씀을 주시는데도 우리는 거부하고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으실때 그를 바라보며 슬피우는 사람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인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에 우리의 탄식이 달라지길 바랍니다. 높아지지 못하는것에 탄식이 아니라 낮아지지 못하는 탄식이 되야 합니다. “왜 나를 못믿어줘”라고 탄식하는게 아니라 내 삶에 크레딧이 없는것에 탄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적모습보다 내면의 영혼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