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IAH 41. 사 64: 1-12,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2025.02.14 09:20
예수인교회
사 64: 1-12,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찬 288장(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오늘 본문은 ‘이사야 63장 15절’부터 이어지는 ‘이사야’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도한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이사야 64장’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1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말씀하고, ‘5절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셨던 은혜와 능력’을 말씀하고, 그러나 또 그것을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리고 ‘8절부터 12절’까지는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구원을 간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본문에서 ‘산들’은 지금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바벨론’과 핍박의 세력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려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2절’ 말씀입니다.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할 것입니다. 주님의 대적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하여 주십시오.” 여기서 ‘섶’이라는 것은 중동 사막에서 자라는 ‘작은 가시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항상 메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불씨에도 순식간에 타버리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려오시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그 적들도, 문제들도 마른 나무 가지가 불에 타듯이, 또 불이 물을 끊이듯이 한 순간에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의 모든 문제들, 질병들, 고통들은 한순간에 해결되고, 아침 안개가 해가 뜨면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듯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는 기도가 있는데, 그것은 ‘1절’과 ‘3절’의 “주님께서 내려오시면”이란 표현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면 우리가 감당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역개정 성경’은 이 구절을 ‘강림’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삶속에, 내 문제 가운데 강림해 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문제와 고난 가운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함께 하시면,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없고, 치료되지 못할 질병이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문제는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듯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새번역 성경’을 번역이 되어 있지 않지만, ‘개역개정 성경’을 보면 ‘1절’의 ‘이사야’ 선지자의 간구의 기도의 시작은 ‘원컨대’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원컨대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컨대’라는 단어의 뜻은 그냥 ‘원합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간절히 간청한다’라는 뜻입니다. ‘주님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한 바램과 매달림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 ‘원컨대’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그 간절함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의 문제와 가정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5절 상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여기서 ‘만나주신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강림,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강림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정의’란 ‘하나님의 공의’를 말씀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바로 ‘말씀을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길’이란 단어의 또 다른 뜻에는 ‘행위, 습관, 태도, 방식’이란 뜻이 있고, 이 단어의 동사의 뜻은 ‘걸어가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의 방식, 주님의 행위, 주님의 태도, 그 삶의 길을 따라 걸어가는 자’를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의 기적만을 따라다니던 ‘무리’가 아니라 주님을 닮고자 했던‘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기억하는 자’를 만나 주시는데 여기서 ‘기억한다’는 뜻은 단순이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그 말씀의 길을 걷으며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5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비참한 고통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절’에 그들의 죄를 비유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옷’이란 표현은 ‘레위기’의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말한 ‘여성의 생리 피’로 더렵혀진 옷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의롭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의 삶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유는 바람이 아니라 시들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영적 상태를 나무에서 떨어지는 시든 나뭇잎에 비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가는 죄인들의 상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더러운 옷’ 즉 죄악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붙어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 그러한 더러운 죄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죄로 인해 부정하고 더러워져서 낙엽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도 아무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르다’는 뜻은 ‘통곡하다, 애통해 하다’라는 뜻으로 회개를 의미합니다. 바로 아무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설사 깨달았어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착각 속에 자신이 하나님으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 하반절’을 보면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분발하다’는 말씀의 원어를 그대로 직역을 하면 “붙잡으려고 일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님을 붙잡으려고 일어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낙엽처럼 하나님과 떨어졌는데, 그렇다면 다시 일어나 주님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 때문입니다.
그래서 ‘7절 하반절’을 보면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얼굴을 숨긴다’는 표현은 ‘등을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등을 돌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고, 매달리지도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과 시선과 몸이 세상 영광을 쳐다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의 시선은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과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여기서 ‘소멸하다’는 뜻은 ‘녹아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녹이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에 영광을 위해 살다보니까 세상의 죄악에 빠져 있다 보니까 그 죄악에 녹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서 더럽고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8절부터 12절’에 그런 우리를, 정말 가망이 없는 우리를 그래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진흙’이라고 말합니다. ‘진흙’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철저히 토기장이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무 가치가 없는 진흙같은 우리를 빚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9절’에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그럼에도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라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시고, 이 환란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따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것을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이룬 것을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하고, 세상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믿음이 없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세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 잘 사는 사람, 헌금 많이 내는 사람들이 높임을 받고, 축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중요한 기준은 그 축복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이룬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삶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그것을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지금 우리의 이 모습이 정확히 바로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전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기 전까지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자랑했습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세상의 풍요만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고, 죄악 가운데 있어 그 삶을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말씀이 선포되고, 선지자들이 외쳐도 그들은 지금 당장 내 삶이 풍요롭고,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심각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심판과 멸망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 진정한 축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제목: 하나님! 이제는 나의 삶과 가정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오고 붙어있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은혜가 임하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가정에 임하셔서 태산 같은 나의 삶의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소서.
중보기도(금: 예배/ 선교지): 주일 예배와 모든 목장과 새벽 예배와 모든 모임 가운데 주의 영이 임하시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이 땅 가운데 세우신 모든 주의 종들이 어둔 세상을 말씀으로 빛으로 비추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필요와 성령충만을 부어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