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IAH 39. 사 62: 1-14,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
2025.02.12 09:12
예수인교회
사 62: 1-14,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 찬420장(너 성결키 위해)
‘이사야서’를 살펴보면서 많은 분들이 질문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말씀이 나오다가 갑자기 심판과 멸망의 말씀이 나오고, 또 어느 순간 갑자기 구원에 대한 말씀이 나와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사야서’는 ‘구원’과 ‘심판’의 말씀을 번갈아 가며 계속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심판’과 ‘구원’은 구별된 것이 아니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가 메시아 앞에 서면 누군가에는 구원의 은혜와 상급의 순간이지만, 또 누군가에는 심판의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계속해서 번갈아 말씀하는 이유는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느냐?”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때에 과연 나는 구원의 은혜와 상급을 받는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심판과 멸망의 편에 서 있는지 내 믿음과 삶을 뒤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 말씀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에돔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화려한 옷차림으로 권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그는 바로 나다.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의 권능을 가진 자다.” 본문은 ‘에돔’이라는 나라를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이방의 나라들 중에 ‘에돔’을 상징적인 나라로 삼으셨겠습니까? ‘에돔’은 ‘붉은’ 이란 뜻으로 ‘이삭’의 첫째 아들, ‘야곱’의 쌍둥이 형이었던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대적 관계를 이루었던 족속이었습니다. 더구나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때는 ‘유다’를 조롱하고 쳐들어와서 전쟁으로 황폐한 그 땅에 남은 작은 것까지도 다 빼앗아갔던 민족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한 핏줄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어려움이 찾아오자 그들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은 비웃고 조롱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유익을 위해 그 고통을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돔’이 이처럼 하나님을 알면서도 죄 가운데 살아갔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에돔’의 조상 ‘에서’를 보면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판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장자권’을 판 그의 경솔한 행동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보다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더 집착하고, 장차 내 삶가운데 역사하실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의 능력보다는 지금 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세상의 것에 더 욕심을 부리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장차 오실 메시아의 심판의 상징으로 말씀하는 것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내가 더 중요하고, 내가 먼저 잘 살아야하고, 내가 복 받아야 하고,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나 중심’, 하나님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는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 민족보다 더 악행을 형제에게 행했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메시야가 오시는데 “붉게 물든 옷을 입고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뜻은 그 옷이 ‘처음부터 붉은 옷’이 아니라 ‘어느 순간 붉은 색에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옷이 붉게 변한 이유에 대해 ‘3절 상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혼자서 포도주 틀을 밟듯이 민족들을 짓밟았다” 바로 메시아께서 포도주 틀에서 포도즙을 짜듯이 하나님을 배반한 그들을 짓밟으셨고, 그들의 피로 그 옷이 불게 물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 하반절’에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내 옷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1절’을 다시 보면, 이처럼 심판하시고 나오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권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분은 누구신가?”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의 뜻은 ‘있는 모든 힘을 다했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철저히 그들을 심판하시고 진멸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화려하다’는 뜻은 ‘옷이 화려하다’는 뜻이 아니라 이 뜻은 ‘찬란하다, 영광스럽다’라는 뜻입니다. 바로 ‘에돔’을 철저히 멸망시키시고 심판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공의가 세우시지는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을 보면 “그들은 반역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물론 10절의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반역한 자들이 바로 ‘에돔’ 족속입니다. 그런데 이 ‘반역하다’라는 단어를 보면,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단어로, ‘반항하다, 다투기를 좋아하다’라는 뜻과 함께 ‘더럽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면서, 오히려 그 삶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겉모습은 ‘하나님의 백성’이라하면서 그 생각과 삶은 하나님을 더럽히는 그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바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두려운 말씀은 ‘6절’ 말씀입니다. “내가 분노하여 민족들을 짓밟았으며, 내가 진노하여 그들이 취하여 비틀거리게 하였고, 그들의 피가 땅에 쏟아지게 하였다.” 여기서 ‘취하여 비틀거라’다는 의미는 ‘방탕한 삶’, ‘죄악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무서운 경고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방탕하고, 하나님을 반역한 삶을 사는 것을 그냥 버려두셔서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퍅한 마음을 그냥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매를 들어 그들을 혼내시고 회개케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게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더 잘 사는 것처럼 그냥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선포되고 선지자의 외침이 있어도, 그들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포도주 틀에 포도가 짓밟히듯 처참한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십니까? 오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또 듣기 힘든 심판의 말씀이구나’ 하면서 그냥 스쳐가는 말씀으로만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심령이 지금 강퍅한 가운데 있는데,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에돔’ 족속처럼 ‘그래도 나는 구원의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서 ‘7절부터 14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그런 다음’이란 단어입니다. 이 뜻은 ‘앞에 것이 있은 후에 뒤에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시기 위한 ‘앞의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을 속이지 않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이지 않는다’는 단어를 원문 그대로 해석하면, 이 뜻은 ‘거짓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짓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형식적 종교적 신앙생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 상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고, 그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했습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보호해 주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부터 14절’까지 보면 이제는 형식만 남은 종교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힘이 들 때마다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분이 이제는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을 떠난 자신들의 거짓된 신앙생활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어려움이 닥치면 본문 ‘11절’을 보면 “모세의 날을 생각하며”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그 때와 같은 능력과 기적을 나타내 주시지 않는가?”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능력에만 관심이 있었지, 정작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세상의 축복과 즐거움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오히려 세상의 삶의 환경에 따라 하나님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자리에 서 있는지, 아니면 심판의 자리에 서 있는지를 항상 살펴보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기도제목: 내 신앙의 삶속에서 에돔과 같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보다 세상의 나의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욕심을 위해 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살았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끊고 심판의 자리가 아닌 구원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소서.
중보기도(수: 다음 세대): 교육부, 유스, 청년들을 세상의 유혹과 죄악으로 부터 지켜주소서. 유스와 청년들을 성령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비전을 꿈꾸게 하소서. 다음 세대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들을 말씀과 성령충만으로 붙들어 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