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SHIPER 31. 삼하 19: 1-18, 슬픔이 된 승리

2024.10.31 09:26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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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9: 1-18, 슬픔이 된 승리, 찬 342장(너 시험을 당해)

‘압살롬의 반란’은 ‘압살롬’의 죽음을 끝으로 극적으로 진압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윗의 군사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마음을 가지고, 이제 ‘다윗 왕’이 있는 ‘마하나임’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기쁜 마음으로 그리웠던 가족들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 올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환영의 함성이 아니라 바로 ‘다윗 왕’이 대성통곡하며 슬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이 반란을 진압한 병사들에게 이 ‘다윗’의 통곡은 매우 당황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다윗’의 통곡이 그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그 ‘다윗’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도 그 날의 승리가 슬픔으로 바뀌었다. 왕이 자기의 아들 때문에 몹시 슬퍼한다는 소문이, 그 날 모든 군인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그 만큼 ‘다윗’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 슬픔을 바라보는 백성들과 군사들조차도 조금 전까지의 승리의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왕의 슬픔에 승리의 기쁨을 누려야 할 그들의 마음조차도 슬픔으로 가득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결국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은, 마치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 온 패잔병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왕의 눈치를 보며 성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압’이 ‘다윗’을 찾아와 ‘다윗’의 이 같은 행동을 비난하고 원망하며, “지금은 병사들을 축하하고 격려할 때”라며 “성문 문루에 나가 앉으라”고, ‘요압’ 또한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왕인 ‘다윗’에게 협박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감정에 따라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분노하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 눈물짓기도 하고, 또 때로는 기쁨과 감격을 누리고 표현할 줄 아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분명히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절제되지 못한 감정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그것이 가정과 또 자신의 속한 공동체 전체에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23절,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감정과 생각과 지혜와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황과 환경에 따라 가정과 공동체에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표현이 가정의 자녀에게, 목장의 목원들에게, 교회의 성도들에게, 직장과 사업장의 동료들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화를 내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표현이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 덕이 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애통해 하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보면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위해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다윗’의 이 통곡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다윗’의 슬픔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도 왕은 두 손으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로, 큰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하고 울부짖었다” 여기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울부짖었다’는 것은 ‘크게 소리를 지르다’는 뜻으로 이 단어의 어원은 ‘창자가 끊어지는 극심한 고통에서 나오는 절규’를 의미합니다. 특히 원문을 보면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라는 표현은 3번 반복해서 부르짖는데, 이 표현은 그 아들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무리 ‘압살롬’을 사랑했다고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이 슬픔을 이해하기는 너무 커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왜 이렇게 슬퍼하고, 애통해 하고, 힘들어 했던 것이겠습니까?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과 또 그로 인한 죽음이라는 하는 이 모든 비극이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사건이 과거의 자신이 ‘밧세바’를 취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였던 그 죄의 대가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무엘하 16장’에서 ‘압살롬’의 반역에, 주변의 모든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다윗’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을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또 도망하는 ‘다윗’을 따라오며 ‘다윗’을 저주하고 조롱하던 ‘시므이’를 주변에 있던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죽이려하자 ‘다윗’은 ‘사무엘하 16장 1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 바로 ‘다윗’은 지금 일어나는 있는 이 모든 일, ‘암논’이 ‘다발’을 범하고, 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이제는 반역을 하고, 그로 인해 조롱을 받고 저주는 받는 이 모든 사건들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도, 또 ‘시므이’의 저주에도 적극적으로 맞서거나 조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이렇게 통곡하고 가슴 아파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 때 그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내 아들 ‘압살롬’이 오늘 이처럼 비참하게 죽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라는 그 생각이 ‘다윗’의 마음을 찢어지게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낱 목동에 불과했던 ‘다윗’을 택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갈 도구로 택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는데, 그런 ‘다윗’이 범죄하고 또 그로 인해 언약의 성취를 이뤄 가야할 ‘다윗의 가문’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고 계시는 그 하나님은 얼마나 큰 탄식과 아픔을 가지셔야 하셨겠습니까? 오늘 ‘다윗’의 슬픔보다 더 큰 아픔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은 ‘다윗’의 슬픔보다 더 큰 아픔을 경험하게 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그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은 ‘다윗’이 느끼는 그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었고,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 경험하는 그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바로 이 은혜를 붙들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죄의 유혹을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억울함을 당하고, 분노와 화가 몰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의 그 못 자국 난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붙잡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다윗’은 왕으로 성공한 인생이 아닙니다. 은혜의 삶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훗날 나이가 많아져서 신하들이 당시 세상의 풍습에 따라 어린 여자를 침실에 들이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다윗은 그 여자와 동침하지 않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했던 죄와 그로 인해 겪었던 시련 때문이었습니다. 순간의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범했을 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 죄의 결과로 인해 자녀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고통 받는 고난을 겪게 된 것을 ‘다윗’은 평생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적으로 당연하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하더라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은혜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죄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회개하고 고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 제목: 삶의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영혼을 살리고, 구원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죄의 유혹과 죄의 자리에서 멀어지게 성령충만으로 붙드소서.

중보기도(목: 교회를 섬기는 자들): 목회자들의 성령충만하여 맡은 사역과 영혼 구원의 사명을 온전히 잘 감당하게 하소서. 교회 제직, 서번트, 목자, 팀장, 봉사자들의 섬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성령충만하게 하소서. 이 땅 가운데 세우신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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