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SHIPER 18. 삼하 11: 18-27, 주님께서 보시기에

2024.10.09 09:14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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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 11: 18-27, 주님께서 보시기에, 찬 287장(예수 앞에 나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금까지 살펴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다윗’의 가장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살며 범죄 하지 않았던 거룩함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 앞에서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며 존경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동안의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윗’의 이미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범죄자의 모습입니다. 그것도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치밀하고도 뻔뻔한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7절, 24절’을 보면 ‘요압’은 ‘우리야’를 죽이는 과정에서 ‘우리야’만 죽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다윗’의 충성된 용사들과 군사들을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무엘하 23장’과 ‘역대상 11장’을 보면, ‘다윗’과 함께 했던 충성스런 용사 37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다윗’이 떠돌이 생활을 할 때부터, ‘다윗’과 함께 했으며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다윗’의 가장 충성스러운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우리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7절, 24절’“임금님의 부하들 가운데 몇 사람이 죽었다”라는 말에서 ‘부하들’이란 뜻이 바로 ‘용사’라는 뜻입니다. 바로 ‘다윗’은 ‘우리아’만을 죽이라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다윗’의 가장 충성스러운 용사 여러 명이 함께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군사들도 함께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다윗’에게 책망을 들을 것을 걱정해 전령을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19절에서 21절’의 말씀입니다. “요압은 전령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네가 이번 전쟁의 상황을 모두 임금님께 말씀드리고 났을 때에, 임금님이 화를 내시며 네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왜 그토록 성에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적의 성벽 위에서 적병들이 활을 쏠 줄도 몰랐단 말이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누가 쳐서 죽였느냐? 어떤 여자가 성벽 위에서 그의 머리 위로 맷돌 위짝을 던져서,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않았느냐? 그런 것을 알면서, 너희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성벽에 가까이 갔느냐?’ 하시면, 너는 ‘임금님의 부하 헷 사람 우리야도 죽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그런데 더 악하고 무서운 것은 그 다음 절에 나오는 ‘다윗’의 반응입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전령에게 말하였다. “너는 요압에게, 칼은 이 편도 죽이고 저 편도 죽이기 마련이니,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여라. 오히려 그 성을 계속 맹렬히 공격하여서 무너뜨리라고 전하여, 요압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여라.” 자신에게 평생을 바쳐 충성을 다했던 용사들과 수많은 군사들이 죽었는데, ‘다윗’은 아무 감정 없어, 아니 오히려 속으로 자신의 뜻을 이룬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칼은 이 편도 죽이고, 저 편도 죽인다” 즉 ‘전투에서 적들이 죽을 때도 있고, 우리 편이 죽을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일들이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임에도 너무나도 뻔뻔하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 더 힘내서 싸우라”고 말하는 너무나도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의 범죄의 결과만 보면 우리는 ‘그래도 나는 ‘다윗’보다는 조금 낫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같은 실수와 죄악을 범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승리를 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다윗’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승리가 계속되자, 그런 ‘다윗’의 마음에도 ‘교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교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왕으로서 마땅히 전쟁에 나가야 함에도 자신이 아닌 군사들만 나가 싸워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 순간에도 자신은 편안하게 낮잠을 자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이 ‘다윗’의 판단력마저 흐리게 했고, 더 이상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능력과 군대와 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서슴없이 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신실했던 ‘다윗’은 이제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교만한 ‘다윗’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고, 자신의 권위와 권력과 지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메커니즘’, ‘죄의 원리’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되는 순간 그 하나님 앞에 거룩했던 ‘다윗’조차도 죄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죄가 이렇습니다. 죄는 누룩과 같아서 우리가 그냥 넘어가는 그 작은 죄가 결국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에서 살펴볼 인물은 ‘우리야’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우리야’는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다윗’은 죄악을 저질렀고, 훗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지만, ‘우리야’는 아무 죄도 없이 허망하고 억울하게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은 이 ‘우리야’의 죽음을 어떻게 보셨겠습니까? 본문 ‘27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 ‘다윗’은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모든 죄를 감추고 완전 범죄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다윗’이 그렇게 아끼던 충신 ‘우리야’가 죽자 그의 아내 ‘밧세바’를 책임지기 위해 결혼까지 하는 성군의 모습으로 비춰져 오히려 더 칭송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완벽한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주님이 보시기에 아주 악하였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우리의 죄가 들키지 않았다고, 그 죄를 안전히 숨기고 끝났다고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코람데오’의 신앙의 모습, 즉 ‘우리의 삶과 신앙은 바로 여호와 앞에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야의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기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의 족보에는 5명의 여인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은 여기서 ‘다윗의 아내 밧세바’라고 말씀하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에서 ‘밧세바’를 말할 때, 성경은 ‘다윗’이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의 억울함을 잊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그의 이름으로 기록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원했던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도,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실록에서도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비롯해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으로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또 아내마저도 빼앗겼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다시 그것을 ‘우리야’의 아내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억울함, 슬픔과 고통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순종할 때 때로는 억울한 일도 있고, 답답한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야’의 죽음처럼 너무 허망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것은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완전히 회복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도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기도 제목: 우리의 삶과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회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억울함과 답답함과 문제 가운데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만을 붙들며 담대히 살아가게 하소서.

중보기도(수: 다음 세대): 교육부, 유스, 청년들을 세상의 유혹과 죄악으로 부터 지켜주소서. 교육부, 유스, 청년들을 성령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비전을 이뤄가게 세워 주소서. 다음 세대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들을 말씀과 성령충만으로 붙들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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