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도전 (히브리서강해 19), 히 11: 17-40, 믿음의 원리
2024.08.23 09:45
예수인교회
히 11: 17-40, 믿음의 원리, 찬546장(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믿음 장’으로 불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를 보면 19번이나 ‘믿음으로써’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은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언급하다가 갑자기 나온 말씀이 아니라 ‘10장’까지의 말씀의 핵심이었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구원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하는 말씀과 연결되고, 또 이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함으로써 ‘12장’의 그 믿음의 적용인 ‘인내’에 대한 말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은 이 두 부분을 연결하는 브리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원리’를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첫 번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받치게 되는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하십니다. “네가 100살에 나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번제로 받쳐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이런 명령을 받으면 당연히 엄청난 고민과 갈등 속으로 들어갈 것 같은데,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 말씀은 받은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종 두 사람에게 제단에 사용할 나무를 짊어지게 하고, ‘이삭’과 함께 네 사람이 ‘모리아산’으로 갑니다. 그 가는 길도 ‘사흘 길’을 갑니다. 그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 길을 갑니다. 그렇게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번제단을 쌓고 이제 진짜로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뽑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께서 급히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 본문 ‘17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바쳤습니다. 더구나 약속을 받은 그가 그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원리’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8절, 1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라 불릴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이셔도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이삭’을 통해 자손의 축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거짓말 하지 않으시며 분명히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처럼,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가는 것이 ‘믿음의 원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약속을 믿는다’, ‘붙잡는다’는 것을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창세기 22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즉 ‘믿음’과 ‘하나님의 경외하는 것’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 ‘경외한다’는 뜻은 ‘두려워한다’, ‘무서워한다’라는 뜻인데, 이 의미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을 넘어 두려움까지 드는 순종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믿음이 있다면, 그 약속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만 취하겠다.’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믿음의 삶’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것이 목적인 삶인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믿음의 사람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겼던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모세’의 부모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그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 부모들은 숨죽여 가면서, 목숨을 걸고 ‘모세’를 길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석 달이 키우면서 이제는 더 이상은 키울 수가 없는 때가 되자, 이것이 발각되면 모든 가족이 죽임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아기 ‘모세’를 어떻게 할까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모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길을 선택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그의 아들로 삼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사실 그들이 가진 믿음은 무서움과 두려움 가운데서 석 달은 견뎠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은 어떻게 보면 두려움 가운데 있었던 지극히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믿음으로도 무엇인가를 행하게 될 때,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놀라운 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 번째 원리는 바로 ‘행함’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그 상황과 형편의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해 그 작은 믿음이라도 포기했더라면, 너무나 두렵고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행하기에 너무 두렵고 어려운 그런 상황 속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그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 믿음으로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 작은 믿음으로라도 주님을 붙잡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행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겨자씨만한 믿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기도제목: 내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삶의 자리에서 행함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그래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과 능력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영혼 구원의 역사 일어나게 하소서.
중보기도(금: 예배와 모임): 주일 예배와 모든 목장과 새벽 예배와 모든 모임 가운데 주의 영이 임하시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이 땅 가운데 세우신 모든 주의 종들이 어둔 세상을 말씀으로 빛으로 비추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