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도전(히브리서강해 3) 히 2: 9~18, 우릴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

2024.07.18 10:33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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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2: 9~18, 우릴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 찬 545장(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1861년 남북전쟁 당시 ‘펜실베니아’ 지역의 작은 마을에 한 남자가 남군과 북군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남군과 북군 모두를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참을 고심한 끝에 기발한 생각을 해 냈습니다. “그래! 아래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어야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북군의 병사들은 그가 입고 있는 회색 바지를 향해 총을 쏘고, 남군 병사는 윗도리를 향해 사격을 가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믿음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을 둘 다 주인으로 섬기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면서, 온전히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쓰여진 배경을 보면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중 특별히 유대인 기독인들이 당시 기독교를 박해하던 유대인들로부터 압박과 협박을 당하자 그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마음이 흔들릴 때, 그들에게 진정한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믿음의 백성으로서 삶 속에서 닥쳐오는 고난과 핍박을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은 이 말씀들 중 특히,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 사랑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당하신 죽음과 고난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쓰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천사보다 못하신 존재, 즉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께서는 그 사탄의 사망을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구원의 창시자’라고 할 때, 이 ‘창시자’라는 단어는 ‘인도자, 수호자, 통치자’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통치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시고,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 본문 ‘11절부터 16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부족할 뿐만 아니라, 또 죄악에 빠져 사단의 죽음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예수님과 같은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높아질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여기서 ‘역시’라는 단어를 ‘개역 개정’은 ‘같은 모양’으로 번역을 했는데, 이 뜻은 ‘전혀 차이가 없는, 구별되지 않는’이란 뜻으로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똑같은 모양으로 인간의 혈과 육으로 오셨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질서가 흔들리는 대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었지만, 예수님 자신에게는 마치 사람이 바퀴벌레가 된 것보다 더 비참한 사건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주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그 비참함과 수치를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로 예수님의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믿음의 백성인 우리는, 그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담대히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7절, 1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18절’에서 ‘도우신다’라는 단어의 뜻은 ‘자신이 그 고난과 고통을 직접 당해보았기 때문에 똑같이 그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알고 도와준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시험과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죗값을 대속하시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직접 느끼시고 체험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한 사랑이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받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과 삶의 문제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삶의 문제가 닥치고, 육체에 질병이 들고, 어려움이 닥쳐 올 때, 그 고난을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크신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그 능력을 믿고 담대히 이겨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그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오직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믿음의 승리를 이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제목: 나와 우리 가족이 세상의 어려움과 문제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오직 나를 도우시는 구원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붙들게 하소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담대함과 믿음의 결단의 삶을 살게 하소서.

중보기도(목: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 담임목사님과 목회자들 가운데 주의 영이 충만하게 하시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헤세드의 역사가 이뤄지게 하소서. 교회의 모든 제직들과 봉사자들의 섬김과 수고 가운데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 이 땅 가운데 세우신 모든 주의 종들이 어둔 세상을 말씀으로 빛으로 비추는 능력의 종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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