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섬김(룻기서 강해 11), 룻 4: 13-22, 결론은 헤세드입니다.

2024.07.12 09:52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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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4: 13-22, 결론은 헤세드입니다. 찬 304장(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지금까지 살펴본 ‘룻기서’는 ‘1장부터 4장’까지의 짧은 성경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약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룻기서’에서 하나님은 등장하시지 않으시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기서’의 전체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헤세드’, ‘하나님의 사랑’ 받을 조건이 하나도 없고, 자격도 안 되는데, 그냥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룻기서’는 ‘룻’이라는 사람을 통해 이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과 은혜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서’를 보면 이 하나님의 ‘헤세드’의 은혜 가운데 있는 ‘룻’의 신분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습니까? ‘1장’을 보면 ‘룻’은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회중에 들어 올 수 없는 악한 모압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2장’을 가면 어떻게 됩니까? ‘13절’을 보면 ‘여종’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3장’에 가면 ‘9절’에 ‘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단어의 또 다른 의미가 ‘첩’이라는 뜻입니다. 즉 ‘첩’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4장’에 가면 그녀의 신분이 어떻게 바뀝니까? ‘13절’을 보면 ‘아내’로 바뀌게 됩니다. 저주 가운데 있던 ‘이방인’에서 축복을 이어가는 ‘아내’로 바뀌는 것, 이것이 ‘헤세드’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헤세드’의 은혜 가운데 있던 ‘룻’은 장소에 따라서도 그 삶이 바뀌게 됩니다. ‘1장’을 보면 ‘룻’이 처음 등장하는 장소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보호해 주지 못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 장소가 ‘밭’으로 바뀝니다. ‘보아스의 밭’으로 바뀝니다. ‘3장’에서는 ‘보아스의 품’으로 그녀의 장소가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어디로 바뀝니까? 한 ‘집안의 가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남편의 보호가운데 있는 장소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1장’을 보면 ‘나오미‘의 ‘비탄’과 ‘슬픔’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리고 ‘2장’에 가면 베들레헴 여인들이 ‘나오미’를 향해서 ‘비탄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장’에 와서는 그 노래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 ‘비탄의 노래’가 ‘축복의 노래’, ‘생명의 노래’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13절 하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여기서 ‘낳았다’는 정확한 뜻은 ‘낳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자녀가 없던 ‘룻’에게 ‘헤세드’의 은혜로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죽음밖에 없던 그녀의 삶을 생명으로 바꿔 주셨다는 것입니다.

‘룻기’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는 그 악함으로 인해, 모든 백성이 각자 자기 생각대로, 자신이 옳게 여기는 대로 살던, 그들의 삶에 하나님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시대에 하나님이 고통 속에 울부짖던 한 여인에게 집중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던 그 순간, 하나님은 그 여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가정을 다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 여인은 누구였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의 인애를 붙잡고 돌아오는 ‘나오미’였습니다. ‘1장’에 하나님을 떠났던 그녀의 가정이 모든 것을 잃고 그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바라보면서 ‘다시 돌아가자, 다시 돌아가자’하고 결단하는 그 순간, 하나님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돌아가자’는 이 한마디가 그녀의 삶을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는 그 절망 속에서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의 ‘헤세드’의 인애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나오미’의 ‘헤세드’를 바라보면 ‘룻’ 또한 “이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를 고백하며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위에 ‘헤세드’의 은혜를 베푸셔서 ‘보아스’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보아스’도 사실은 ‘헤세드’의 은혜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8절부터 22절’을 보면, ‘룻기’는 족보를 열거하며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그 족보를 보면, 그 시작이 ‘베레스’입니다. 그런데 ‘12절’을 보면 ‘베레스’는 ‘다말’과 ‘유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다말’과 ‘유다’는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말’을 죽이려 할 때, ‘유다’의 인애로 생명을 구하고, 태어난 아이가 ‘베레스’였습니다. 그는 도저히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21절’을 보면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입니다. 그런데 ‘살몬’의 아내가 누구냐면, ‘마태복음 1장 5절’에 예수님의 족보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라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누굽니까?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몸을 파는 ‘창녀’였습니다. 그 창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보아스’였습니다. 바로 ‘보아스’ 역시 인애의 결과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 ‘룻’, ‘보아스’, 이처럼 인애의 사람들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는데 이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고 완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룻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18절’부터는 나오는 족보를 보면 핵심 단어가 ‘낳고’입니다. 그런데 ‘1장’의 핵심 단어는 ‘죽고’였습니다.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고, ‘나오미’의 인생도 죽은 그 절망의 상황가운데 ‘죽고, 죽고, 죽음의 인생’이, 하나님의 ‘헤세드’가 덮어졌을 때 어떻게 바뀝니까? ‘낳고, 낳고, 낳고’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나오미’와 같이 쓴 인생의 ‘마라’가 있었습니다. 쓰디 쓴 ‘마라’가 있었고, 절망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고, 감출 수 없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과 아픔과 고통 위에 하나님의 ‘헤세드’의 은혜가 부어지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의 백성, 이방인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오늘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헤세드’의 은혜의 약속이며 선포인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고통 가운데, 슬픔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어려움과 절망이 와도 어떤 사람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앞에 은혜의 자리로 나와, 그 ‘헤세드’의 은혜를 붙잡고, 오히려 이 고통이, 아픔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절망과 아픔,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헤세드’와 ‘은혜’가 덮일 때 우리의 삶은 다시 소망을 품고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그 하나님의 ‘헤세드’의 은혜가 그 위에 덮어질 때, 그 절망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픔보다 훨씬 더 큰,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아무리 깊어도 하나님의 ‘헤세드’와 우리의 아픔이 만나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헤세드’의 사랑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 가득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제목: 내 삶과 가정, 그리고 배우자와 자녀들이 문제와 고통 속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는 결단을 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도,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고 또 붙들며 살아가게 하소서. 그래서 그 헤세드의 은혜로 나의 삶이, 나의 가정이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중보기도(예배/선교지): 주일 예배, 목장 예배, 모든 모임 가운데 성령 충만을 부어 주셔서, 어두운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선교지와 사역 가운데 함께 하소서. 이 땅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모든 예배와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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