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이긴 사람들 (사사기강해 44), 삿 19: 1-30, 제목? 없다!
2024.06.14 09:10
예수인교회
삿 19: 1-30, 제목? 없다! 찬 420장(너 성결키 위해)
본문은 너무 비극적이고, 참혹하고, 엽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도저히 정할 수 없어 제목을 ‘없다’라고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1절’의 말씀에 나오듯 ‘왕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공의와 정의도 없는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이런 비극이 사사시대의 말기가 아니라 사사시대의 초기에 있었던 사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벌하여 그 땅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땅으로 바꾸도록 그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명을 잊고, 단지 그 땅에서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삶의 유익과 평안만을 위해 살다가 결국에는 가나안 땅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똑같이 죄악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두 번째 에필로그’인 오늘 본문을 보면 ‘18장’에 나오는 ‘레위 사람’과 ‘또 다른 레위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레위인’이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유독 그들의 타락의 모습을 말씀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 삶의 타락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1절’에 이야기의 시작하면서 “레위 남자가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데려왔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에 첩을 두는 문화는 당시 이방 문화, 가나안의 문화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부터 한 남자와 여자로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이것이 성경의 가정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첩을 두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들을 말씀으로 올바로 이끌어야 할 ‘레위인’ 조차도 그 죄악된 문화를 따라 ‘첩을 두었고, 그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시작부터 성경은 당시의 타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그 첩이 화가 나서 집을 나와 친정집으로 갔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4개월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친정집에 머물자, 그 남편이 그 여인의 마음을 달래서 데려오려고 종과 나귀 두 마리를 끌고 처갓집을 가게 됩니다. 그러자 장인은 먼 길을 찾아온 그 사위를 극진히 환대하며 대접합니다. 그리고 다섯째 되던 날 이 레위 사람은 계속 붙잡는 장인의 권유를 뿌리치고 늦은 시간에 집을 향해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늦은 시간 길을 떠나다 보니 날이 어두워져 하룻밤을 머물 곳을 찾게 됩니다. 그러자 그의 종이 주인에게 가까운 이방 땅인 ‘여부스’에서 하룻밤을 머물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12절’을 보면 그 레위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안 된다.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이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기부아까지 가야 한다.”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어떻게 이방인의 땅에서 머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8km 정도 더 떨어져 있는 ‘기브아’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이 레위 사람은 ‘히브리인’과 ‘이방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정작 그의 삶은 이방인과 전혀 다른 것이 없으면서, 사람만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별되어야 할 것은 구별되지 않으면서, 필요하지 않는 것은 구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꼭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 세상에서의 삶은 전혀 구별이 되지 않으면서, 단지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그 한 가지로 ‘나는 구별된 백성이다’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 그래서 이들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브아’ 땅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은 기브아에 들어가서 묵으려고 그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들어가 성읍 광장에 앉았으나, 아무도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묵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근동 지역의 유목민들에게는 ‘환대’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보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될 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 나그네가 원수라도 ‘환대’하고 그를 돕는 것이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 그러므로 약한 자를 돕고,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아주 당연한 의무이며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 그 레위 사람 일행이 그렇게 외면을 당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그 모습을 보고 그를 맞이하는데, 성경을 보면 그 노인 또한 원래 그 성읍 사람이 아니라 그곳으로 이주해서 살던, 오늘날로 말하면 이민자, 나그네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을 보면 그 노인이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그 레위 사람이 대답을 하는데, 우리가 보는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나는 유다 땅의 베들레헴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나는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냥 ‘집’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이 ‘레위 사람’은 그 노인에게 잘 보여, 그 집에 머물기 위해 ‘자신의 집’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으로 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쉽게 말하면 “나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이방 사람들과 똑같이 첩을 두고, 자기 뜻대로 살면서, 자기가 필요한 순간에만 “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은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목사입니다. 내가 장로, 권사입니다, 교회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삶의 행함이 없는 말뿐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분명, 삶이라는 강력한 복음 증거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겁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 그렇게 해서 그 노인이 그 일행을 맞아 환대를 하고 대접하게 되는데, 그 순간 끔직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성읍의 불량한 사람들이 그 노인의 집에 몰려와 그 나그네 남자를 요구하며, ‘22절’을 보면 “그를 끌어내 동성애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참 기막히고 충격적인 일이 버려집니다. 노인은 당시 자신의 집에 들어온 나그네는 책임지고 보호해야 한다는 당시 환대의 문화에 따라, 그들에게 그 레위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딸과 그 레위 사람의 첩을 내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불량한 사람들이 그 노인의 말을 듣지 않자, 이번에는 그 레위 사람이 그 노인마저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손으로 첩을 직접 그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여인을 밤새도록 윤간하여 욕보이고, 새벽에 풀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나 가슴 아픈 것은 그 여인이 그 몸을 이끌고 동이 틀 무력, 자기 남편이 머물고 있는 그 노인의 집에 돌아와 그 문 앞에서 쓰러져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거기에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가 그 문지방을 잡고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건 그 남편인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 혼자 떠나려고 나오다가 그 쓰러져 있는 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쓰러져 있던 여인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같이 가자”라고 말만 합니다. 이 ‘레위 사람’은 단지 그 여인을 자신의 소유물, 물건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레위 사람은 그 여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에 와서, 정말 엽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 여인의 시체를 12토막을 내서, 12지파에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는 각 지파는 크게 분노하게 되는 장면까지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불량한 사내들”이란 정확한 뜻은 “남자들”이란 뜻입니다. 이 의미는 그 성읍의 사람 중에 특별히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은 ‘일반적이 그 성읍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악한 행동들이 그 당시는 이방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구별되어야 할 이들이 가나안 사람들처럼 살고, 가나안 사람들보다 더 타락한 모습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이 끔찍한 사건이 이방 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땅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참혹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얼마나 죄악에 쉽게 물들고, 타락하게 되는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9장’과 이전의 사건, ‘미가의 신상, 우상 사건’인 18장을 보면 성경은 똑같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하는 표현입니다. ‘사무엘 시대’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끝임 없이 “우리에게 왕을 달라”고 외칩니다. 성경은 이것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왕이 없어 말씀대로 살수 없다고 하더니, 왕이 없어서 이렇게 타락했구나!”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삶의 왕으로 섬기지 못하고, ‘사사기 19장 6절’의 말씀처럼 자기의 뜻대로, 좋은 대로 자신이 자신의 삶의 왕이 되어 살아, 결국에는 이런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삶의 왕은 누구십니까? 단지 입으로 고백하는 왕이 아니라 삶으로 순종하는 그 왕을 통해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 이것을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하루를, 또 앞으로 우리의 삶에서 왕으로 삼고 살아갈 왕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한 레위 사람의 삶이 타락함으로써 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한 마을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의 신앙이 무너지면, 신앙을 지켜야 될 사람이 신앙을 지키지 못하면, 그 악한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타락하고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한 사람이 변한다고 무슨 능력이 있겠나?, 나 한사람 기도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나?”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붙들며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제목: 이 세상의 죄악과 탐욕에 물들어 사는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나타내는 삶을 살기 위해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성령의충만과 능력을 부어 주소서. 나의 신앙과 믿음과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시어, 가정과 직장과 목장과 교회 가운데 선한 구원의 역사,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넘쳐 나게 하소서.
중보기도(예배/선교지): 주일 예배, 목장 예배, 모든 모임 가운데 성령 충만을 부어 주셔서, 어두운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님의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소서. 선교사님들의 선교지와 사역 가운데 함께 하소서. 이 땅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모든 예배와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