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NO OTHER GOSPEL 07. 갈 4: 1-20,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2024.03.21 10:30
예수인교회
갈 4: 1-20,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찬540장(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마태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시는데,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 줄여서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주기도문’의 처음 시작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라는 단어의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아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는 단지 우리가 죄에서 자유를 얻고,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 신분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에서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도 ‘요한복음 1장 1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보혈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믿음의 성도는 이 감격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마치 성인되지 못한 상속자처럼 율법에 따라 살며, 그 율법의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진정한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억매여 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모르기 정말 절절히 깨닫는다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하나님이 없다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종으로 사는 것과 아들로 사는 것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믿지 않는 우리 가족과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왜 그들이 그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구원을 설명해도 세상 사람들이 그 구원을 믿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그토록 전도하고 싶어도 “너나 잘 믿으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볼 때,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과 구원받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전혀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있고, 기도의 간구도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성도의 삶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사도바울’로부터 복음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지 ‘사도바울’을 위해 “눈이라도 빼주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도바울’은 심한 ‘안질’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처음 복음을 듣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누렸을 때, 얼마나 기뻤습니까? 그 순간 주님만 나와 함께 계시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고, 어떤 상황과 환경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그토록 감사와 은혜가 넘치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이 말씀은 이제는 ‘사도바울’이 ‘그들의 원수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14절, 15절’에는 천사와 같고, 심지어 예수님과 같아서 ‘사도바울’을 위해 눈까지 빼주고 싶어 했던 그들이 이제는 ‘사도바울’을 원수처럼 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그 복음으로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아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도,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에 종노릇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변화된 삶 없이 살아간다면, 여전히 구원받기 전과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나중에는 참된 복음의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해지고, 듣기 싫어지고, 나중에는 거부하게 되는 원수와 같이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반드시 이 세상의 삶속에서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은 “나는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종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성도의 삶에서 변화된 중요한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19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바로 ‘사도바울’은 구원받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영광과 은혜를 누리는 순간, 이제는 그 은혜와 감사를 나누고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구원의 생명을 얻기 위해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해산의 고통’이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이 단어는 ‘엄마가 출산을 위해 겪는 고통’을 의미하면서 또 ‘욕구를 참는다, 억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누군가의 영혼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나의 욕구와 욕심을 참고, 억제하며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도 내가 구원받은 것이 끝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이웃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해야 할 수고와 노력과 헌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며 ‘사도바울’은 영적인 자녀를 해산하기 위해 어떤 수고를 감당했겠습니까?
첫 번째로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본문 ‘1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렸던 것같이 당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풍토병으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병으로 ‘간질’이나 ‘안질’과 같은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내 몸에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었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육체적 연약함, 질병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질병은 사람들을 시험에 빠지게 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 ‘사도바울’의 약함 가운데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고, ‘사도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에는 내가 어떤 육체의 약함이나 삶의 연약함 가운데 있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몸 다 나으면 하지, 형편이 좋아지면 하지”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육체의 약함, 내 부족한 형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럼에도 내게 능력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주님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은 약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아나서,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으로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내 약점이 곧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 고난과 수치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는 내 상황과 형편과 건강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 중에도, 연약함 중에도 그것을 통해 역사하실 성령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히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영혼을 살리는 해산의 수고를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내야 합니다.
본문 ‘17절,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17절’의 ‘열심’과 ‘18절’의 ‘열심’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17절’의 ‘열심’은 ‘율법의 열심’, ‘세상의 열심’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18절’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산다’는 말을 참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 ‘열심’이 ‘세상의 열심이냐’,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믿음의 상속자인 우리는 세상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나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 제목: 하나님 아버지!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하소서.
그래서 내 약함과 부족함이 오히려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중보 기도(목: 지도자들): 담임목사님과 목회자들의 성령충만으로 사명 감당을 하게하소서. 교회를 섬기는 제직/서번트/팀장/목자/봉사자들의 섬김 속에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게 하소서. 이 땅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서있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