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JESUE CHRIST 50, 요 21: 1-14, 주님 없이는 안 됩니다.

2024.03.07 10:20

예수인교회

조회 수244

요 21: 1-14, 주님 없이는 안 됩니다. 찬송 338장(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20장 19-23절’에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 20장 26-29절’에 ‘도마’도 함께한 11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갑자가 장면이 바뀌어서 ‘디베랴 바다’, 여기서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호수’를 말하는 것으로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한 ‘디베랴’라는 도시의 이름을 따서, ‘갈릴릴 호수’를 ‘디베랴 바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뒤 ‘갈릴리’로 갑니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28장 7절’을 보면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알리며,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언제 오실까? 조금 있으면 오실까?, 아니면 내일 오실까?, 곧 오시겠지!” 이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데, 자신들이 생각했던 시간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게 됩니다. 그러자 조금씩 낙심하게 되고, 더 이상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본문 ‘3절’을 보면 ‘베드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을 하니까, 다른 제자들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며 고기를 잡으러 갑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세상에 나가서 일하고,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물고기를 잡으러 갔지만, 문제는 주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못하고 세상만 바라보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할 때, 여기서 ‘고기’라는 단어는 ‘할리유오’라는 헬라어인데 뜻은 ‘어부들이 시장에 팔기 위해서 잡은 고급 생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셔서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잡혔다”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고기’ ‘익투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뜻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써의 물고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게 하신 물고기의 의미인 ‘익투스’라는 단어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두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초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익투스’라는 단어의 글자들의 의미 안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는 세상적인 삶만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한 ‘고기(할리유오)’를 잡으러 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삶속에서 주님이 함께 하는 삶, 말씀이 함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사는 주님이 주시는 고기인 ‘익투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미 동틀 무렵이 되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들어서셨으나, 제자들은 그가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동이 틀 무렵 오셨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때까지 예수님이 계신 줄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과 자신의 능력으로 고기를 잡아보려고 하다 보니 주님이 계신 것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 힘으로 안 되고, 실패하고 낙심될 때, 비로소 그들은 주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살려고 몸부림 칠 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고기도 안 잡히고, 낙심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때서야 주님을 찾게 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빈 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빈 그물로 낙심할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이 ‘빈 그물’일 때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7명의 제자들은 대부분 어부였습니다. 더구나 ‘갈릴리 호수’는 자신들이 예수님이 제자가 되기 전까지 생업을 위해 물고기를 잡던 곳입니다. 그들에게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가장 자신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예수님 없이도 충분히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장 자신감이 넘친 그곳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그물’을 통해, 그들은 내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무력한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앞으로 감당해야하는 사명, 영혼구원의 사명, 복음을 전해야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헌신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주님을 함께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목회자로서,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재직으로써, 또 목자와 서번트와 팀장과 교회 봉사자로써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하나님 없이, 기도 없이, 성령충만 없이 그것을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어리석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 그물’은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목사님! 제 주변에는 하나님 없이도 그물이 가득한 사람들 많습니다. 물질의 고기가 가득하고, 기도하지 않아도 목장 잘되고, 예배에 잘 빠져도 자녀들이 잘되는, 그물이 가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그 사람이 세상의 고기를 가득 잡아도, 하나님 보실 때, 그 그물은 빈 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주님과 함께함 없이, 성령의 은혜 없이 가득 채운 그 그물은, 하나님 보실 때, 아무 것도 없는 빈 그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17장 5,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성도도 물론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삶에 우리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제목: 주님! 내 삶과 우리 가정이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들며 살아가게 히소서. 그래서 낙심과 절망가운데 무너진 내 삶과 가정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함께 하셔서, 내 인생의 빈 그물에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차게 주소서.

중보기도(목: 지도자들): 담임목사님과 목회자들의 성령충만으로 사명 감당을 하게하소서. 교회를 섬기는 제직/서번트/팀장/목자/봉사자들의 섬김 속에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게 하소서. 이 땅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서있게 하소서.

댓글 쓰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