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JESUE CHRIST 48, 요 20: 11-18, 부활의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좋아하십니까?

2024.03.05 10:28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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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 11-18, 부활의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좋아하십니까?, 찬 288장(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예전의 모 대학의 역사학 교수께서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가 부활할 수 있느냐?”,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가 있느냐?”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안 믿기가 어려운 증거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제시한 네 가지의 증거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오는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 당시 여성의 증언은 법정에서 아무런 효력이 없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조차도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아주 교묘하게 조작된, 정치적으로 계산된 내용이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에서 가장 중요한 첫 증인을 이런 의심받는 여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권위가 있는, 인정을 받는 인물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 그것도 과거에 귀신에 들려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던 비천한 여인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웠다는 것은 정치학적으로 아주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증거는 그 부활의 주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통해,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우리를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또 고난 주간과 부활의 주님을 소망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기억해야 할 것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의 감격과 은혜를 누린다는 것은, 그 감격과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여자여, 왜 우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15절’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울다’라는 단어는 ‘크게 울다’라는 뜻인데, 이 의미는 “비통함과 애통함으로 그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서 올라오는 절망의 통곡”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극한 슬픔’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마리아야!”하고 그녀를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리아’는 “라부니!” 이 말의 뜻은 “나의 선생님, 나의 주인”이란 뜻으로, 놀라운 감격과 기쁨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향한 감격의 호칭이었습니다. 그 절망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제자들에게 가서’라고 할 때, ‘갔다’는 뜻은 ‘그냥 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달려갔다, 정신없이 뛰어갔다’는 뜻입니다.

즉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그 감격과 기쁨에 넘쳐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흥분되어 제자들에게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는 말씀처럼, 참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누린 ‘마리아’의 그 절망의 슬픔이 감격의 기쁨으로 바뀌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부활의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꼭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은 “평화가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인사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 ‘평화, 평강’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샬롬’에서 나온 말인데, 그 어원은 “울타리를 쳐서 그 안에 있는 양들을 이리와 적들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평화는 우리의 삶의 문제가 없어지고, 해결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에 나를 노리고,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하려는 수많은 영적 싸움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적들로부터 우리 하나님이 나의 울타리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로부터, 적들로부터, 문제로부터 나를 지키심을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며, 평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활의 주님께서 이 평화와 평강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망 권세마저 이기신 주님께서 이제는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그의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은혜이며 감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은혜와 감격을 누리는 성도는 오늘 본문의 ‘마리아’처럼 그 부활의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전에 읽은 글 중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챤은 ‘사랑’과 ‘좋아하는 것’이 혼돈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에도 헌신과 희생이 있습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땀을 흘려 노력하고, 물질을 소비합니다. 그러나 좋아함은 그 기준이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기뻐해야, 만족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만족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드러나고, 자신이 원하는 분명한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만족이 사라질 때, 그 결과가 뜻대로 나타나지 않을 때, 자신의 기쁨이 사라질 때, 그 좋아함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떻습니까? 사랑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있습니다.

상대가 만족해야 합니다. 상대가 행복해야 합니다. 자신이 드러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도, 상대가 기뻐하는 것에 끝임 없이 관심을 갖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주님을 좋아하고 있습니까?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의 신앙은 내가 기준이 되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라기는 이 사순절 기간을 지나며, 주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은혜를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를 통해서 그 십자가의 사랑이, 부활의 은혜가 우리 가정과 삶, 그리고 목장과 교회 가운데 가득 흘러넘쳐, 그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제목: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감격과 은혜가 회복되게 하시어, 삶으로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가정과 삶 그리고 목장과 교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

중보 제목: (화: 목장/VIP) 목원들의 삶속에 있는 영적 싸움과 삶의 문제 가운데 평안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반드시 승리하게 하소서. 목원들의 가정 중에 믿지 않는 가족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주변의 VIP들이 목장과 교회에 함께할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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