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JESUE CHRIST 46. 요 19: 28-42,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2024.02.29 10:38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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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9: 28-42,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찬 150장(갈보리 산 위에)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부터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한마디로 말하면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쓴 ‘엔또 슈샤꾸’라는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갈릴리에서 보여주신 그 많은 기적들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람과 파도까지도 잠잠케 하시던 그 예수님의 능력이 왜 십자가를 앞두고는 왜 나타나지 않는가? 예수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뺨을 때리던 그 군중들의 모욕 속에서 예수님은 왜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면서 그는 이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참된 능력이다. 예수님의 참된 능력은, 진정한 능력은 그 모든 수모와 고난과 죽음 앞에서도 그것을 묵묵히 참고 걸어가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든 기적과 능력을 뛰어 넘는 참된 사랑의 능력이었다.”

십자가의 고난, 십자가에서의 무기력한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무기력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님의 능력, 즉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이미 죽기 직전까지 모진 채찍질과 모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까지 600m의 길을 십자가를 끌고 가는 극한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십니다. 그리고 오전 9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디신지 3시간이 지난 정오가 되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예수님은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하십니다. 5시간이 지나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오고, 그 고통으로 인해 때때로 질식 상태에 이릅니다. 또 십자가의 기둥이 흔들릴 때마다 온 몸이 찢겨지는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점차 몸에서 물과 피가 거의 빠져나가고 관절마다 부서지는 듯한 경련이 일어나고 심장이 압박되기 시작하자 가슴이 으깨지는 고통을 당하시게 됩니다. 이제 거의 모든 몸의 피와 물이 빠지자 온 몸은 통증마저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극한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본문 28절’ “목마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마름의 비명’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냥 하신 말씀, 그냥 내뱉은 고통과 절규의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예수님의 이 말씀조차도, 이제 정신을 잃을 정도의 그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하신 말씀조차도,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이루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말씀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생애에 진정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이제는 우리 안에 거하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역사하도록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단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 안에 말씀이 거하고,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그 일을 위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목적이며 능력이며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사명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믿는다면, 또 그 삶에서 그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말씀이 내 삶 가운데 이뤄지고, 성취되는 것을 믿고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이 문장은 ‘수동태’이며, ‘직설법’이고 ‘완료형’입니다.

그래서 그 정확한 뜻은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몇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다 이루다’는 단어가 장사를 하는 상인들 사이에 사용이 되면, 거래를 하고 인보이스를 받고 그 값을 완전히 지불할 때 사용되는데, 그 뜻은 ‘다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그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이 단어가 아이들이 숙제를 다 끝마치고 검사를 받을 때 사용되는데, ‘내게 맡겨진 숙제를 끝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군대에서 사용될 때는, 군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 사명을 다 완수했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또 이 단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 사용되는데, 이 뜻은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제물이 ‘받아드려졌다, 연납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제물로 오셨고, 우리의 죄값을 치루기 위해서 대속물로 오셨고, 그 사명을 위해서 성육신하셨고, 그 성육신의 사명을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마치시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값이 치러졌다, 제물이 받아졌다. 이 제사는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예수님의 삶, 그리고 이 십자가의 고난의 순간에도 이 모든 것이 말씀의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는 반드시 그 안에, 그 삶에 말씀이 생명이 되어 그 삶으로 말씀을 실천하고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38절부터 4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장례를 준비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그런데 그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아니라, 나약한 여인들 그리고 유대관원이었던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 지도자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고 살았던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였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평소에는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그가 오늘 본문 ‘38절’을 보면 ‘빌라도’ 앞에 나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은 중죄인이기 때문에, 그 죽은 시체는 죄수들의 무덤에 던져져 들짐승이나 독수리의 밥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죽은 시체를 달라는 것은 자칫 자신도 그 사람의 추종세력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또 ‘39절’을 보면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장례용 향료를 100근 정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당시 몰약은 방부제로 사용되었고, 침향은 건조제와 방취제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100근 약 32-35kg 정도 되는 양인데, 이것은 당시 왕족의 장례의 경우 사용되었던 양입니다. 바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구주,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 신분에 맡게 장례의 몰약과 침행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 또한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에 보면 그는 전에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 또한 예수님을 믿고, 그 진리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었지만,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까봐, 야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리마데 요셉’, 그리고 ‘니고데모’ 이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세상을 더 두려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던 때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가장 처참한 죽음을 당하신 그 순간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숨어 지내던 이들이 이처럼 거룩한 믿음이 결단을 하고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계기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 본문 ‘38절’ 앞부분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뒤에”, 개역개정 성경은 “이 일이 있은 후”라고 말씀합니다.

“그 뒤에, 이 일이 있은 후”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의 삶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보면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신을 내어 주시고, 죽은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 달라’고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참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저주의 십자가,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보면서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구원하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무엇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를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세상을 더 크게 보고, 우리의 신앙을 숨기고 감추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유익되는 것만 바라보고, 주님을 위해 손해 보는 것은 싫어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용서하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가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까?

‘셍케비치(Sienkiewicz)’의 노벨상 수상작인 <쿠오바디스>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여 ‘압비아가도(Appian Way)’를 정신없이 도망하다가, 공중에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고 놀라 발길을 멈춥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을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놀라 ‘베드로’는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지금 나는 네가 버리고 도망친 그 사망의 저주가운데 있는 로마의 시민을 위해 두 번째 십자가에 달리려 간단다. 그런데 베드로야! 지금 너는 어디로 가느냐?

그 순간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 이제는 제가 그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로마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에 우리에게 “지금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조차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주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도 ‘아리마데 요셉’처럼, ‘니고데모’처럼, 또 ‘베드로’처럼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사순절 기간을 지나며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함께 십자가의 사명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누가복음 14장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기도제목: 내 안에 십자가의 은혜가 회복되게 하시고,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 삶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나게 하소서. 주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살리신 것처럼, 나도 주님의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게 하소서.

중보기도(목: 지도자들): 담임목사님과 목회자들의 성령충만으로 사명 감당을 하게하소서. 교회를 섬기는 제직/서번트/팀장/목자/봉사자들의 섬김 속에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게 하소서. 이 땅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서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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