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JESUE CHRIST 28. 요 12: 1-11, 믿음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듭니다.

2024.01.29 23:56

예수인교회

조회 수215

요 12: 1-11, 믿음의 차이가 삶의 차이를 만듭니다. 찬 382장(너 근심 걱정 말아라)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을 그렇게 기뻐해 드린 일들이 많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너무나 기뻐하셨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얼마나 크셨는지,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이 일도 말하여지리라”고 축복까지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그 주간에, 항상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머무셨던 ‘베다니 동네’에 가셨는데, ‘본문 1, 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으로 인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잔치 자리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아주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다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는 일이 버러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그대로 두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단어의 의미에는 “그것이 옳다, 만족한다, 기뻐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다른 사람들, 특히 ‘가롯 유다’는 ‘본문 5절’“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며 분노합니다.

실제로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는 일반 성인 남자가 1년 동안 버는 돈을 의미합니다. 요즘 돈의 가치로 따지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을 한 번 닦는 것에 80,000불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좀 ’과하다’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솔직히 ‘마리아’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면 ‘가롯 유다’의 말이 공감이 되십니까?

그렇다면 왜 ‘마리아’는 그 비싼 향유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또 예수님을 그것을 크게 기뻐하셨을까요? ‘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는 죽은 시체의 썩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그 시체에 향유를 바르곤 하였습니다. 즉 ‘마리아’의 이 행동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준비하는 거룩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마리아’는 자신의 그 행동이 장차 이런 놀라운 주님의 뜻을 이루는 행동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마리아’와 ‘가룻 유다’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받은 ‘은혜의 차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받은 은혜의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믿느냐?”는 ‘믿음의 차이’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비 ‘나사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표적과 기적과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참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이것은 불가능 한 일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그리스도시구나!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그 향유 옥합을 깨서 붙는 대상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에게 붓는, 자신의 최고를 드리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낭비일까요? 너무 과한 행동이었을까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 것은, 진짜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로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은 따라 다니는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정한 구원의 은혜와 감격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반응과 변화하는 상황을 보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마리아’와 ‘가롯 유다’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믿음, 지금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 그 은혜는 과연 ‘마리아’와 같은 은혜와 믿음입니까? 아니면 ‘가롯 유다’와 같이 환경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세상의 것을 더 크게 보며, 그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은혜와 믿음입니까?

혹시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삶에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면서, 정작 우리의 삶은 ‘가롯 유다’와 같이 세상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그 은혜와 믿음도 흔들리고, 변하고, 때로는 그것마저도 잃어버리고 의심하고 낙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사하며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라기는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구하고, 바라는 기도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그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감사하며, 그 은혜와 감격 속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박국 3장 17, 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기도 제목: 내 안에 변치 않는 굳건한 믿음을 주셔서, 내 삶의 상황과 환경보다 더 크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내 삶의 형편과 상황 때문에 내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그 상황과 형편을 담대히 이겨나가게 하소서.

중보 제목: (화: 목장/VIP) 목원들의 삶속에 있는 영적 싸움과 삶의 문제 가운데 평안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반드시 승리하게 하소서. 목원들의 가정 중에 믿지 않는 가족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주변의 VIP들이 목장과 교회에 함께할 수 있게 하소서.

댓글 쓰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