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JESUE CHRIST 26. 요 11: 1-44, 신앙인의 불신앙
2024.01.24 21:34
예수인교회
요 11: 1-44, 신앙인의 불신앙, 찬 540장(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아무 문제없이 매일 매일 건강하고, 일도 잘되고, 슬픔이나, 고통이 없이 온 가족이 행복하게 살다가 다 천국에 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이런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백성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도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할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 ‘나사로의 가정’은 온 가족이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던 믿음의 가족이었습니다. ‘2절’에 보면 ‘마라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이었고,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헌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하게 예수님께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오시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더 그곳에 머무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때와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때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도 사랑하신 그 가정에 이 같은 절망과 불행이 왜 닥쳐왔겠습니까?
그 이유에 대해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바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은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축복을 받기 위한 ‘축복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부족함이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더 붙잡고 살아가게 하며, 그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결국에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로 ‘나의 약함’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는 강함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절대 회복될 수 없는 그 절망의 상황,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그들에게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치고, 문제 가운데 있을 때, 단지 그 문제와 어려움만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담대히 주님과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보면, 이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곳을 오시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다’가 뛰쳐나가 본문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32절’을 보면 ‘마리아’도 똑같이 말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이제는 모두 끝났다고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섭섭함을 말한 후에 ‘마르다’가 ‘22절’에 이렇게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얼핏 보면 이 ‘마르다’의 고백은 굉장한 믿음의 고백처럼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참된 구주로 믿지 못하고 있는 ‘마르다’의 모습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23절’에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에, ‘마르다’는 ‘24절’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마르다’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예전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 “네! 종말의 때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때, 그 때 먼 훗날 우리 오라버니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께 ‘믿는다’라는 고백이 아니라, ‘22절’을 보면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라고 고백하고, 또 ‘24절’에도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아는 것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르다’처럼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복음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에 대해, 성령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닥치고, 어려움이 닥칠 때, 그 문제와 어려움이 내가 기대하고 소망했던 대로 되지 않고, 기도한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절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란 단어의 뜻은 ‘묶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어원을 보면 이 단어는 ‘흔들리다’라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비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는 바다에 배의 밧줄을 항구에 꽁꽁 묶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란 문제가 없고, 걱정이 없을 때만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고 인생의 바람이 불고 풍랑이 불어도 ‘내 삶을 주님께 꽁꽁 묶어두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한계가 이르고, 그 한계조차 끝난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영광을 바라보면 담대히 나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 26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에게 ‘아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4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아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그 삶에서, 그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내 삶을 온전히 묶어두는 믿음, 그 믿음으로 담대히 이겨나가는 불신앙이 아닌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제목: 주님! 내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게 하소서. 그래서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내 마음과 생각과 삶을 주님께 묶고, 주님을 붙잡고, 낙심하지 않고 담대히 이겨 나가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가정의 문제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중보기도(목: 지도자들): 담임목사님과 목회자들의 성령충만으로 사명 감당을 하게하소서. 교회를 섬기는 제직/서번트/팀장/목자/봉사자들의 섬김 속에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게 하소서. 이 땅의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서있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