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가을특새 FOCUS 7  삼상 6:10-16  벳세메스(회복)로 가는 소

2023.10.05 07:18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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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가을특새 FOCUS 7   삼상 6:10-16    벳세메스(회복)로 가는 소  찬191/427  내가 매일 기쁘게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 이냐? 짬뽕이냐? 고민합니다.  그래서 나온것이 짬짜면 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나온 “짬짜면에서 뭘 먼저 먹을까?”입니다. 신앙생활의 갈등과 고민도 끝이 없습니다. 블레셋은 법궤를 고민하다고 결국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이때 그 사명을 암소 두마리에게 맡깁니다. 우리는 이 소들이 걸어가는 벳세메스의 길에서 신앙인의 3가지 모습을 봅니다.

첫째 벳세메스로 가는 길에  “소의 아픔을 봅니다.”

    먼저 어떤 소였는지 살펴 봅시다.  삼상6:7 그러므로 이제 새로 수레를 하나 만들고 아직 멍애를 메어 본 일이 없는 어미소 두마리를 끌어다가 수 수레에 메우고 그송아지들은 떼어서 집으로 돌려 보내십시오. 여기서 두마리소는 멍애를 매어본적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힘쎈 황소가 아니라 연약한 암소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송아지를 출산한 어미소로 송아지에게 젖을 주어야 할 소였습니다. 그럼에도 10절을 보면 새끼 송아지와 생이별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이 소들은 가면서 계속 웁니다. 왜그렇습니까? 처음 져보는 멍애가 너무 고통스럽고, 송아지들에게 젖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길을 가며 이 암소들처럼 울음소리를 낼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왜 하나님이 나같은 연약한 자에게 이런 걸 시키셨을까? 포기하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고 생각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같은 연약한 자들에게 이런 무거운 일이 주어졌을까요? 성경은 그것에 대해 …“이런 연약한 암소들을 보내는데 되돌아 오지 않고 벧세메스로 간다면 진짜 하나님이 하신일 이란걸 믿겠다…”(9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연약한 우리와 교회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연이고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야 합니다. 영화촬영장에서 전쟁씬을 찍을때 재미있는 것은 엑스트라들이 총에 맞으면 바로 쓰러져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꼭 한 두발짝 걸어가서 쓰러지거나, 비명도 크게 내고, 꼭 카메라 근처까지 와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럼 영화가 안되는 거죠. 조연은 조연으로 살아갈때 주연이 빛나는 법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가장 큰 아킬레스가 있었습니다. 간질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낫지 않은 고질병이었습니다. 설교때도, 잠잘때도, 사람이 있든 없든 시도때도 없이 고생을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원망해야 하는데 그는 그 약함을 자랑합니다. 왜입니까? “이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벳세메스의 소처럼 억울한 눈물, 뒤돌아 보게 만드는 일이나 지혜가 부족하고, 끈기도, 인내도 부족하게 느껴지진 않습니까? 근데 잘 생각해보면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더 의지하며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아픔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에 집중하며 벳세메스를 향해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둘째 벳세메스로 가는 길에  “소의 인도를 봅니다.”

     중요한 내용입니다. 12절  그 암소들은 벧세메스쪽으로 가는 길로 곧장 걸어갔다 그 소들은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나 벗어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면서 똑바로 길만 따라서 갔고 그 뒤로 블레셋 통치자들이 벳세메스이 경계까지 따라서 갔다. 두번째로 재미있는 점은 이 암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벳세메스는 이 소들이 가본적 없는 곳인데 무려  22km나 떨어져 있어서 보통 걸음으로 약 이틀이나 걸리는 거리를 소들이 스스로 찿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남겨진 송아지들을 뒤로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걸어 갔다고 기록합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거죠. 소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들을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거나 사람을 세울때  걱정과 염려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결정했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왜죠?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찌라도 그걸음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잠16:9) 대학시절 제가 그렸던 그림 중에  “길”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큰 길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데 다 제각각 지그 재그로 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사람이 결국 한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이게 하나님뜻인가? 저게 하나님 뜻인가? 너무 걱정 안해도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얼마나 왔다갔다 합니까? 모세도 그랫고? 정반대로 가던 요나마저도 결국 하나님의 길대로 갔습니다. 왜죠? 우리의 걸음은 주님의 손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간혹 사람이나 사역을 피해 도망칠때가 있습니다. 그럼 꼭 옮겨간 교회에서 또 그런 사람과 일이 주어집니다. 도망친다고 도망쳐지나요? 요나를 보세요 눈떠보니 니느웨로 다시왔습니다. 하나님의 길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인도속에서 주어지는 삶, 주어지는 사역, 주어지는 사람에 아멘 하며 벳세메스로 가는 예수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벳세메스로 가는 길에 “소의 운명을 봅니다.”  

    이윽고 소들은 13-16절까지 벳세메스로 도착하자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블레셋사람들도 기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준 소들은 어떤 영광과 칭찬을 받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그 소와 수례를 쪼개어 번제물로 바쳤다는 점입니다.(14절) 이것이 소의 운명이었습니다. 수고한 것에 칭찬은 커녕 재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소의 운명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죽음의 길”이란 점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우리가 죽을 때 가정과 일터가 삽니다. 반대로 우리가 살려고 하면 남이 죽는 원리입니다. 사역과 봉사를 할때 이와 같습니다. 내가 편해지려고 하면 자꾸 남을 힘들게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고생하면 남이 편해집니다. 이것이 사역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죽으려고 하지 않고 우리는 날마다 살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화목제가 됬다”는 점입니다. 소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기뻐했고 16절에 블레셋 사람들도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우리는 화평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가정과 일터와 주변 사람들 가운데 화목케 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살려고 하거나, 손해안보려고 하고, 희생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안에 있습니다. 그 마음을 내려놓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벳세메스의 길을 갑시다.    

1) 벳세메스의 길을 가는 기도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기도)

2) 중보기도(목: 지도자들을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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