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의 땅을 향해 63 출 32:1-14  신앙생활의 비애

2023.08.28 16:14

예수인교회

조회 수242

비상의 땅을 향하여  63   출 32:1-14   신앙생활의 비애  찬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신앙생활의 비애는 배운것과 현실의 차이를 느낄때입니다.  모세는 40일간 시내산에서 구름에 덮여 성막과 하나님 백성의 삶에 대해 배우고 있는데 그 밑에서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비극적인 위기가 발생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이것을 어떻게 회복 할 수 있을까요?

첫째  신앙생활의 비애는 “기다리지 못할때 발생합니다.”  1-6

이 사건이 발생한 처음 발단을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백성은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 시내산에 올라갔던 모세가 40일이나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그들은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것이 기다림속에 발생하는 우리안에 “욕망”입니다. “재정이 빨리 채워지지 않을때, 기다리던 사람이 안올때, 직장이 구해지지 않을때, 문제에 대해 답답해 질때” 우리는 기다리기 보다는 뭔가를 대신해서 안정감을 찿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을 보십시오. 그들의 금고리들을 빼어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낸 신이다.” 말하며 섬깁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걸까요? 첫째 십계명인 어긴것입니다. 둘째 형상이 잘못됬습니다. 금송아지는 당시 고대근동지역의 풍요와 다산의 바알신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을 바알과 동격으로 여긴것입니다. 셋째는 예배가 잘못됬습니다. 5절에 아론은 우상숭배를 “주님의 절기”라고 가르쳤고 6절에 백성은 이것에 대해 “뛰놀았다”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원어를 보면 “성적행위”를 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고대근동의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였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섬긴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1절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기다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을 주는 걸까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타임라인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주말에 설교준비로 바쁠때 막내아이가 고장난 장난감을 가져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빠가 나중에 고쳐줄께” 말했는데 아이는 알겠다고 해놓고 잠시후에 와서 “왜 안고쳐주냐”고 때를 썼습니다. 내가 말한 나중은 “주일이 지난 후”를 말했는데 아이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잠시 후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잘 기다릴까요? 아버지의 동선과 아버지의 타임라인”을 아는 사람입니다. 큰 아이들은 내가 일하고 있는것을 알기에 언제 도움을 요청하고, 언제 함께 밥을 먹고, 언제 대화해야하는지를 압니다. 나의 동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계신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안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금 기다림이 발생했다면, 지금 당장의 금송아지 보다 시내산에서 나를 위해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신앙생활의 비애는 “십자가를 피할때 발생합니다”  7-9

  하나님은 모세에게 범죄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참혹한 현실을 알려주십니다.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안목과 영적 민감성을 주십니다. 안타까운것은 거룩한 시내산 앞에서 언약을 맺자 마자 타락한것입니다(7절) 마치 신혼 첫날밤에 외간남자와 바람을 핀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죄성을 이렇게 진단합니다.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한마디로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봤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변할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도와 싸우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사람은 하나님도 못바꾸겠다.”  우린 살다보면 이런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이런 배우자, 이런 자녀, 이런 직장 동료, 이런 지체등 이런 사람을 만날때 우리는 하나같이 포기하고 싶거나 때려치우고 싶어집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바뀔것을 믿습니까? 죄송하지만 사람은 바뀔 수 없습니다. 바뀐다면 바뀌는게 아니라 이전의 존재가 십자가에서 죽고 새로운 존재로의 회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청송교도소의 교도관이었던 박효진장로님이 쓴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없다>를 보면 흉악한 살인마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롭게 바뀐모습들이 등장합니다. 근데 자세히 보면 그사람이 인격이나 성품이 다듬어지거나 좀더 나은 사람이 된게 아니라 예수를 영접하면서 이전의 살인마는 없어지고 예수님을 닮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아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죽어야 되는 가망없는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도 포기할정도 일까요?(9절) 근데 그럴려면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때론 내 성질을 죽이는 십자가, 내 돈을 죽이는 십자가, 내가 아끼는 그것을 죽이는 십자가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거기에 나를 못박는 새벽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신앙생활의 비애는 “대속(중보)의 기도로 회복 될수 있습니다.”   10-14

  결국 안타까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여 이스라엘을 없애고 새로운 민족을 일으킬 생각을 생각을 하십니다.(10절) 실제로 노아의 홍수때 지면을 쓸어버리고 다시 인류를 재건했듯, 모세에게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10절) 여러분이 만약 이런 제안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직장은 아니야 더 좋은 직장을 주마, 이 학교는 아니야 새학교를 주마, 더 좋은 차를 주마, 더 좋은 사람들을 주마, 솔깃한 제안 아닙니까? 놀라운 점은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과 자신을 믿지 못했고,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11절) 이 장면을 통해 두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반드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택한 족속과 사람이 패역해도 계획했던 구속사를 이뤄가십니다. 우리가 기대하던 사람이나 교회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뜻대로 인류를 이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가끔은 요나처럼 “내가 없어지면 아쉬워 하겠지” 하며 이탈하지만 실상 하나님의 공동체는 사명공동체이기에 끝까지 사명이 완수되야 함을 말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럼에도 박넝쿨을 아까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런 헌신과 섬김이 가정과 일터를 살리고 목장과 교회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런 배우자를 위해서 무릎을 꿇을때, 이런 영혼을 위해, 자녀를 위해, 이런 목장과 일터를 위해 무릎을 꿇을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고 그곳을 회복 시키십니다. 왜일까요?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대속의 기도로 죽어가는 가정과 목장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제목: 오늘도 기다릴수없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역사를 믿음으로 눈으로 보게 하소서 가정과 공동체를 위해서 오늘도 희생과 헌신을 잘 감당케 하소서

중보제목: (금:선교사/주일,새벽,목장예배와 목자수련회를 위해서) 16곳의 수련회와 선교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이번주일예배와 새벽예배와 목자 수련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댓글 쓰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