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하는 교회 20. 고전 9: 1-15.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할까?
2023.03.17 09:51
예수인교회
고전 9: 1-15.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할까? 찬 288장(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사도바울’은 선교를 통해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그 중에서도 ‘고린도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년 반 동안이나 거기 머물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이 선교를 다니며 교회를 개척하는데 있어서 이렇게 오래 있던 교회가 몇 교회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떠나고 고린도교회 안에서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고, 서로 파가 나눠 싸우면서, 일명 ‘바울파’가 아닌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도바울’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을 세 가지로 비난을 하는데, 그것에 대한 ‘사도바울’의 변론이 바로 ‘고린도전서 9장’입니다.
그들의 비난의 내용을 보면, 첫 번째는 ‘바울은 온전한 사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은 결혼도 못한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결혼을 못하는 게 흠으로 여겨졌습니다. 세 번째는 바울이 돈을 탐낸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였던 사도권을 부정한 이유는 당시 ‘사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사람, 둘째 예수님에게 직접 말씀을 배웠어야 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세 가지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특별히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셔서 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제자들에게 검증을 받고 사도로 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왜 자신의 ‘사도권’을 그렇게 강조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도권이 부정되면 자신이 전도한 이방 지역의 선교와 복음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지면, 결국 이방 교회에 전한 ‘사도바울’의 복음의 권위가 공격을 받게 되는데, 특히 이단들에게 공격을 받고 교회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반드시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의 문제’에 대해, 자신은 결혼을 못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선택의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같은 ‘바울’의 복음을 위한 희생을 오히려 ‘결혼도 못했다’고 비방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동생들이나 게바처럼,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 즉 나도 ‘베드로’처럼 결혼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이방인의 사도로 그 사명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일부 성도들은 ‘사도바울이 돈에 대한 탐욕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이 ‘초기에는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 살다가 이제는 돈을 달라 한다’, 그리고 ‘선교 헌금을 강요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성장하면서 온전히 복음에 전념하기 위해 자신의 생계를 교회에 의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기근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다른 지역의 교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으로 섬기기 위해 ‘고린도교회’에게 구제 헌금을 할 것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7절부터 14절’의 말씀을 통해 교회가 목회자의 생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일곱 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서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라고 말씀할 때, “거두다”라는 뜻에는 “당연한 권리, 당연한 결과”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목회자가 교회의 섬김을 통해 그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본문 1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권리를 조금도 행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나에게 그렇게 하여 달라고 이 말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도 나의 이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위한 이 모든 권리와 유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나의 자랑거리’라고 말합니다. ‘나의 자랑거리를 헛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자랑’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이 좋아하는 자랑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학벌과 배경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랑으로 보면 ‘사도바울’은 완벽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을 7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세상적으로 완벽한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음의 사도가 되어 이방인의 구원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박해와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를 통해 이방 땅에 교회가 세워지고 주님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이 ‘자신의 자랑거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세상의 자랑거리를 버렸더니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자랑’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성도에게 ‘세상의 자랑거리가 필요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세상의 자랑거리로 무엇을 이루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돈으로, 그 명예로, 그 권세와 건강으로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세상의 자랑거리로 끝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의 자랑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랑거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믿음의 성도의 자랑은 하나님의 열매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제목: 나의 삶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중보제목: (금: 선교지와 모든 예배) 15곳의 선교지와 선교사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일/새벽/목장에 성령의 충만이 임하고 날마다 새로운 VIP들이 함께 할 수 있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