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하는 교회 14. 고전 6:1~11. 실패하지 맙시다.
2023.03.0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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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1-11 실패하지 맙시다 찬송가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더 좋은 교회로 비상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3월 8일 수요일 새벽 예마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그러한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기대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6:1-11절을 보면서 제목을 어떻게 정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심정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11번의 질문을 합니다. 서신을 적으면서 사도바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답답함, 안타까움, 속상함, 간절함, 애달픔, 부끄러움 등등 여러가지 감정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편지가 고린도교회에 전달되기 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편지가 어떤 역할을 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가끔은 우리도 고린도교회와 유사한 교회의 소식들을 사람들을 통해 또는 미디어를 통해 듣고 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교회들이 그런 소식의 대상이 될 때, 우리도 답답함, 안타까움, 속상함, 간절함, 부끄러움 등등의 감정을 갖게 됩니다. 교회도 역시 사람이 모인 작은 사회이기 때문일까요? 물론 예수인 교회는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문제의 주인공이 되는 이런 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설교 제목을 정하는 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설교 원고를 계속해서 작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정한 제목은 실패하지 맙시다입니다.
실패하지 말아야지 결심해도 다시 말해 이 번에는 꼭 성공해야지 마음을 굳게 먹어도 그 결심과그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물론 내 결심, 내 각오, 내 마음이 실패에도 변함이 없을 때 우리는 언젠가는 성공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러한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고 인생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외부 신호에 반응하도록 하는 ‘구아닌 단백질 연결 수용체’의 기본적 성질과 구조를 해명한 공로로 2012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생화학자 로버트 레코프위츠(Robert Lefkowitz)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99% 실패했고 성공한 건 1%에 불과하다. 중도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너무 많았다.” 전구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토마스 에디슨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실패를 교훈 삼아 원인을 분석해 이에 대비하면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교훈입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잘 되지 않는 방법 1만 가지를 발견한 것”, “나는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성공에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패 없는 성공이란 없다. 과학자 레코프위츠와 사업가로서 에디슨이 한 말들은 그들이 실패를 통해 성공에 이르렀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입니다. 실패는 그런 점에서 한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삶에서 실패는 과학에 근거한 발명이나 발견을 얻는 과정과 다른 의미를 지닐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사도 바울의 말씀, ‘실패하지 맙시다’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그 고백은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일까요?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일이 틀어지는 순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인생이 부정 당하는 듯한 감정에 사로 잡히기도 합니다.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관계의 실패, 사기, 파산 등 사업의 실패, 자녀를 먼저 떠나 보내는 일 등등 삶의 실패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영향이 더욱 파괴적인 것은 내가 어떤 일의 피해자가 될 때입니다. 내 부족함이나 잘못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기에 그러한 실패는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힘들 때가 많습니다.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관계의 실패는 우리의 삶에서 매우 쓰라린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당하는 배신 또는 배신까지 아니라고 해도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면 그 여파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삶에 흔적으로 남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평생 마음에 각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괴롭히는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결코 지워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실패와 다른 차원에서 우리는 실패가 한 인간에게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고린도교회가 심각한 문제에 처한 것을 봅니다. 그 문제는 교인들 가운데 소송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세상 법정으로 그 문제가 넘어갔고, 사도 바울의 질문에서 우리는 바깥 사람들이 재판관으로 세워진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성도들 앞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 앞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걸어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지으려고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한다는 사실에 그럴 수 있습니까 개탄을 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즉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그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가진 자가 없는지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는 바울을 우리는 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떤 이가 다른 사람을 걸어 소송할 일이 있을 경우에, 성도들 앞에서 해결지으려고 하지 않고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소송한다고 하니, 그럴 수 있습니까? 더 가슴 아픈 일은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교인들 간의 문제인지만 이것은 또한 교회의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특히 믿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개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로 더 나아가서 기독교의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흥미로운 뉴스 기사를 접한 일이 있습니다. 호주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 방송국에서 좋은 내용, 선한 내용의 뉴스들만을 만들어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시청률이 낮아서 결국 그렇게 방송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좋은 소식, 선행을 알리는 뉴스, 아름다운 소식의 방송에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반대로 누군가의 가십, 부정적인 내용의 뉴스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실제로 그러한 내용은 우리 기억에 더 오래 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예로 들어볼까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롯의 딸들의 비행,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충직한 장수 우리야를 죽게 한 것, 욥의 고난, 가롯 유다의 배신,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이야기 등,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성경에 나와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보다 더 강하게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은가요? 인간은 그러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교회에 생긴 문제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과 도전을 주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바로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 필요, 그리고 그 책임감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인 교회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교회입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예수인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까? 예수인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찾아보면 그 이유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굳이 찾지 않아도 교회가 다음세대를 위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있고 모든 분들이 다음 세대를 돕는 일에 열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처럼 되기를 원하고 선교에 힘쓰는 교회이기 때문에 좋은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 좋은 교회로 비상하기를 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좋은 교회가 아닌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좋은 교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더 좋은 교회로 비상하기를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그것을 꿈꾸는 것은 이미 예수인 교회가 좋은 교회임을 말해주는 것이죠.
좋은 교회는 선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 굿은 좋은 그리고 선한을 뜻하는 형용사입니다. 더 좋은 교회는 그래서 더욱 선한 교회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면, 미국에서 지내는 12년 7개월의 시간 동안, 저는 4개의 교회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다섯 번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작년 10월부터 예수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으니까, 이제 5개월 밖에 안됐는데 이전 교회들에서 경험한 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교단으로 따지면, 미국 감리교회, 장로교단 교회, 그리고 제 출신인 성결교단 교회 두 곳을 경험했습니다. 모두 20-30명이 모이는 교회들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처음 1년간 출석했던 교회는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담임 목사님과 교인들 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출석한 교회가 그러니까 마음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지름길임을 저로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수를 생각할 때 우리는 좋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을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문제는 좋은 교회들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 문제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 소송이 진행 중인 교회에 관한 소식을 우리는 종종 접합니다. 혹자는 그 일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그 일을 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좋은 교회 그리고 더 좋은 교회로 비상하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우리가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실패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그런 점에서 치명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예전처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음을 의미함을 우리는 잘 압니다. 사도 바울은 경고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남창 노릇을 하는 자나, 동성연애를 하는 남자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 단호하게 고린도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 교회가 과연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역시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얼마쯤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어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어 주심을 받고, 거룩하게 하여 주심을 받고,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희망의 메시지를 고린도교회에게 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메시지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와 같은 문제 많은 그래서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심히 염려가 될 때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음을 받고 거룩해 질 수 있으며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거룩한 성령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의롭게 만들어 주실 때 교회는 비로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두 말할 것 없이 더 좋은 교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편지를 통해 그 방법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좋은 교회인 우리 예수인 교회가 더 좋은 교회로 비상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내가 씻음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그리고 의롭게 되기를 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