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발자국 87. 행 25: 13-27. 감동이 아닌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할텐데...
2022.12.08 10:42
예수인교회
행 25: 13-27. 감동이 아닌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할텐데… 찬 358장(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사도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갇혀 ‘벨릭스’총독의 심문을 받고, 또 2년 후 ‘베스도’총독에게 심문을 받게 되는데, 재판이 진전이 없자 ‘사도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의 신분을 내세워 황제에게 재판 받기를 청하게 되고 ‘베스도’총독이 허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일로 고민하던 ‘베스도’총독이 자신을 방문한 ‘아그립바’왕에게 ‘사도바울’의 일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장면입니다.
본문 13절,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인사하려고 가이사랴에 왔다. 그들이 거기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에, 베스도는 바울에 대한 고발 사건을 왕 앞에 내놓고 말하였다. “벨릭스가 가두어 둔 사람이 하나 있는데,”
이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베스도’는 ‘사도바울’의 일로 크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사도바울’을 ‘가이사’의 재판을 받게 하겠다고 결정을 하고 나니까, 증거도 없이 황제에게 죄인을 보내게 되면 27절에도 ‘베스도 총독’이 말하고 있지만, 나중에 ‘바울’의 무죄가 입증되고 로마시민이 억울하게 감옥에서 살았다는 것이 황제에게 밝혀지면 자신의 상황이 곤란해 질 수 있어서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아그립바’왕에게 상담을 요청하게 됩니다.
본문 18절부터 20절 말씀입니다.
“원고들이 일어나서 그를 고발할 죄목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짐작한 그런 악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와 맞서서 싸우는 몇몇 문제점은, 자기네의 종교와 또 예수라는 어떤 죽은 이에 관한 일인데,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사건으로 거기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그대로 갇혀 있게 하여 달라고 호소하므로, 내가 그를 황제에게 보낼 때까지 그를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벨릭스’총독과 ‘베스도’총독의 재판 과정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또 법적으로 전혀 죄가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 25절, 27절’을 보면 성경은 ‘베스도’총독의 입을 통해 의도적으로 ‘사도바울’은 죄가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가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받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성령의 능력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능력을 나타나게 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영광의 고난인 것입니다.
우리는 ‘감동’과 ‘은혜’의 차이를 구별해야 합니다.
‘감동’은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아주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면 어떻습니까? 그 누구도 나도 앞으로 저렇게 살아야지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감동을 받은 그 순간으로 끝납니다.
한마디로 감동은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다릅니다.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 안에는 반드시 ‘변화’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내가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는 ‘내 삶이 그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과 모습이 그 말씀으로 이제는 완전히 바뀌고 변화된 것이 바로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교회도 가고, 예배를 드리며 찬양과 말씀 안에서 큰 감동을 받는 것을 오히려 좋아합니다.
‘감동’은 받되 ‘은혜’만 받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듣지만, 정작 그 삶은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서,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 마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들에게 예배 속에서, 말씀 속에서, 찬양 속에서 감동은 받되 은혜는 받지 말라고, 삶의 변화가 없는 ‘감동’을 마치 ‘은혜’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 편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퇴색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감동’이 아니라, ‘삶의 변화’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서 역사하고, 예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예수로 인해 내 삶의 불편함과 불이익은 걱정하면서, 정작 예수를 위한 수고와 고난은 애써 외면하고, 또 영혼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에는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모습이 ‘은혜의 삶’이 아니라 ‘감동의 삶’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6절’말씀을 보면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바로 ‘참된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21장 18절에서 22절’에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이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로 인해 받는 고난을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고백한 이유는, 바로 그 삶이 감동의 삶이 아닌 은혜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기도 제목: 내 삶이 감동이 아닌 은혜의 삶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노력과 고난도 감사하게 하시며, 그 삶속에 성령충만함을 부어주소서.
중보 제목(목: 지도자들): 담임 목화자/교역자/목자/서번트/사역팀장들의 성령충만과 강건함을 위해 기도합시다. 각 가정의 부모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