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발자국 74. 행: 20 1-16절. 성령충만을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2022.11.08 08:04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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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0 1-16절. 성령충만을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찬 359장(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지금까지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3장’부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1, 2, 3차 전도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서 겪게 되는 수많은 박해와 고난 그리고 피곤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가운데서도, 오히려 ‘사도바울’은 지치지 않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처럼 ‘사도바울’이 끝없는 열정과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장 역시 이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소동이 그친 뒤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오게 해서, 그들을 격려한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마케도니아로 떠나갔다.”

전 시간, ‘에베소 교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부흥이 일어나자, 당시 이방신 ‘아데미’를 섬기며 그 우상을 만들며 살았던 세공장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에베소’에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동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잠잠하게 되자,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 곳의 여러 지방을 거쳐 가면서, 여러 가지 말로 제자들을 격려하고, 그리스에 이르렀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간 ‘그리스’는 당시 ‘아가야’의 수도였던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 볼 말씀은 “격려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에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난 목적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격려했다”라는 뜻은 “이끌다, 가르치다, 권면하다”라는 뜻으로,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난 목적은 그가 ‘1, 2차 전도여행’을 통해 구원시킨 성도들의 신앙과 삶을 다시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그 믿음을 격려하고 권면하면서, 그들이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한 ‘양육’이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도바울’은 ‘양육’을 위해 그 험한 ‘3차 전도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의 삶에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바로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그 믿음이 양육되고 성장되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 오후와 수요일에 나누고 있는 ‘생명의 삶’, ‘확신의 삶’과 같은 ‘예삶 아카데미 공부’와 성경통독 중요한 것이며,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같은 말씀의 양육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절부터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그는 석 달을 지냈다. 바울은 배로 시리아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그는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그 때에 그와 동행한 사람은 부로의 아들로서,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가운데서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그리고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다. 이들이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무교절 뒤에 배를 타고 빌립보를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이르러, 그들에게로 가서, 거기서 이레 동안을 지냈다.”

‘사도바울’의 전도여행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부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하는 대적들을 생긴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고린도’에서 석 달 동안 있다가 곧바로 ‘시리아’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니아’에서 ‘안디옥’으로, 바로 배로 타고 가려 했지만, 마침 그곳에 자기를 죽이려 하는 유대인의 무리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도바울’은 다른 일행들은 먼저 배로 보내고, 자신은 다시 ‘마게도냐’ 위쪽으로 올라가서 아주 멀고 힘든 길을 돌아서 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원했던 모든 사역의 일정이 뒤틀리게 되었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성도가 말씀대로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복음 중심의 삶을 살다보면, 세상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쉽고 편한 길도 멀리 돌아서 힘들게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때로는 내 삶의 유익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고난으로 나두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로 이뤄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성도의 삶의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그 고난을 단순히 의미 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축복을 이루는 과정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비록 ‘사도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닌, 힘들고 고난의 여정을 돌아‘마가도냐’로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여정을 통해 ‘마게도냐’에 또 한 번의 큰 성령의 역사와 부흥을 일으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한 성도는 자신의 환경과 형편을 바라볼 때,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믿음으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7절부터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간의 첫 날에,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기로 되어 있어서 신도들에게 강론을 하는데,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또는 ‘안식일 밤에’ 또는 ‘토요일에’ 또는 ‘주일에’ 우리가 모인 위층 방에는,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드고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때, ‘유두고’라는 청년은 그 예배에 참석하게 되지만 바울의 설교가 길어지자 그만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살펴본 말씀은 ‘창문에 걸터앉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창가에 앉아 한 다리는 예배당 안에, 또 다른 한 쪽은 바깥쪽으로 내밀고 기대어 앉아있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그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그 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마치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예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두고’는 예배와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 예배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나도 반드시 받겠다’는 열정과 사모함이 없이, 그냥 성령의 역사를 지켜보는 방관자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날 많은 성도 중에도 이 ‘유두고’와 같은 안타까운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분명 ‘유두고’는 예배의 장소에 나왔습니다.

세상에서 있던 것도 아니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다리는 교회에, 또 한 다리는 세상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예배를 통한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기보다는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이 세상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분명히 교인이요, 직분자요, 재직이지만 그의 생각과 관심은 예배와 성령충만이 아니라, 세상적인 삶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예배를 통해 일어나는 성령의 은혜를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로 사모하기 보다는 ‘주일에 교회만 나오면 됐지’라는 생각으로 내 삶이 성령의 은혜를 받던 말던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의 물질과 성공에만 중심을 두는 ‘유두고’와 같은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10절에서 12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에게 엎드려, 끌어안고 말하기를 “소란을 피우지 마십시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였다.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그 살아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서 그들은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

여러분!

‘유두고’란 이름의 뜻은 “다행이다, 행운이다”라는 뜻인데, 이 이름의 뜻처럼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도 개인적으로 다행한 일이었지만, 또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더욱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복음에 대한 방관적인 자세가 아니라, 더욱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럼 본문 13절부터 16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배에 먼저 가서, 배를 타고 앗소를 향하여 떠났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바울을 배에 태울 작정이었다. 바울이 앗소까지 걸어가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우리는 앗소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를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갔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떠나서, 이튿날 기오 맞은편에 이르고, 다음날 사모에 들렀다가,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렀다.

이런 행로를 취한 것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베소에 들르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이제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앗소’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미둘레네’라는 섬을 거치고, 그 다음날에는 ‘미둘레네’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기오 섬’을 거치고, 또 그 다음날에는 ‘사모 섬’에 들리고, 그 다음날에는 ‘에베소’ 남쪽 4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밀레도’라는 항구 도시에 도착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그는 눈을 뜨기만 하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쉬지 않고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서둘렀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의미는 “온 힘과 노력을 다해 달려갔다”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도바울’이 그렇게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 했겠습니까?

그 이유를 본문 16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으로 도착하기 위해서 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왜 ‘사도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그렇게 급히 서둘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를 기억하고, 또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불같은 역사를 기념하는 ‘오순절예배’에 반드시 참석하기 위해, 오순절 날까지 꼭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성령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은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는 내 삶의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령충만함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며, 그 성령의 은혜 가운데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통해 그 문제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 제목: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성령충만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분별하고,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중보 제목: (화: 목장/VIP) 모든 목장의 모임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고, 그 은혜가 모든 목장을 영적으로 깨우고 성령 충만하게 하소서. 목장 내의 사탄이 주는 영적 시험과 방해가 있다면 믿음으로 이겨 승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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