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oss 25 요13:1-20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2022.05.27 07:47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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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oss 25 요13:1-20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찬309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셨다.”는 말씀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바로 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더구나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데, 당시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한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보통 외출을 하고 들어오면 발을 씻는데, 오늘 말씀을 보면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까요?

이스라엘은 건조하고 사막 기후라 샌들을 신고 밖에 다니면, 금세 발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그 집의 하인들이 발을 씻겨 줍니다. 그러나 집 주인이 없거나 하인이 없으면, 무리 중의 가장 낮은 사람이 발을 씻겨 주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오늘 본문 말씀 이전의 사건을 보면, 제자들 사이에 서로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찾이 하느냐?’며 서로 높은 자리를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다툼 후에 이제 마지막 만찬을 하러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는데, 누구도 서로의 발을 씻어 주려 하질 않았습니다.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낮아지기를 거부하면서, 눈치만 보다가 식사의 자리까지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길 ‘가롯 유다’까지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 2절을 보면, “악마가 벌써 그 마음에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 모습이 오늘 본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본문에서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할 때, ‘끝까지’라는 의미에는 시간과 크기를 다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시고, 어떠한 상황과 순간에서도 그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여기서 ‘본’이라는 뜻은 ‘모형, 본보기, 증서, 증거’라는 뜻으로 법적인 증거를 의미합니다. 또 ‘보여 준다’는 뜻은 ‘주다, 하사하다, 부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본을 보였다’는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풀이 하면 “예수님께서 모형이 되고 증거가 되어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법적인 명령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사랑의 그림자라도 닮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번째로는 나의 부르심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분명한 이유와 사명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끝까지 사랑하려면 먼저 우리의 ‘부르심’을 알아야 합니다. 왜 내게 이 가정을 주셨는지, 왜 이 가정에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로 보내셨는지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이유를 알 때, 우리는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예수님의 사랑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고, 남편과 아내의 문제와 단점이 고쳐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때, 우리의 가정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나를 보내셨는지, 그 부르심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은혜 받고, 축복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우리 교회에 이루고자 하시는 분명한 부르심을 알 때, 우리의 신앙은 살아나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번째로, 끝까지 사랑할 있는 방법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 결단 있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예수님은 지금 식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식사를 하실 때 유대인들은 한 팔을 받치고 거의 누워서 식사를 합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식사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결단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에 능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몰라서 못하는 것’보다는 ‘알면서도 안 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일어나는 결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새벽예배의 중요성을 알지만 여러 문제와 상황을 이유로 외면을 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삶과 영혼의 생명인 것은 알지만, 시간문제, 삶의 피곤함을 이유로 우리를 결단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영혼 구원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결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큰 결단이 아니라 내 삶에 작은 것부터 결단하길 원하십니다. 잠시라도 기도하고, 잠시라도 주님을 묵상하고,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결단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작은 결단의 시작이 결국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에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째는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는 섬김의 낮아짐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입으신 옷은 ‘자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색은 ‘고귀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선생님으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는 것은 ‘그 당시 종이 손님의 발을 씻길 때 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둘렀다’는 것은 ‘당신의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종 위치로 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섬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섬김’은 ‘낮아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섬김의 낮아짐이 있을 때, 가정을 살아나고, 교회는 회복되며,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번째로,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 있어야 합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물을 떠오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발을 씻기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씻기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물기를 물 한 방울 없도록 닦아 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수고가 없이는 우리는 절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과 결단 그리고 섬김과 수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 제목: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도록 성령으로 함께 하소서.

중보 제목(:지도자들): 담임 목화자/교역자/목자/서번트/사역팀장들의 성령충만과 강건함을 위해 기도합시다. 각 가정의 부모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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