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oss 14 요 6:60-71 / 너희도 가려느냐? / 찬 314장

2022.04.25 16:17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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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oss 14 요 6:60-71 / 너희도 가려느냐? / 찬 314장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어오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이젠 저녁이 다 됐으니.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뚝아, 내일이 뭐니?” 그러자 ‘메뚜기’는 “잠시 뒷면 해가 지고 하늘에 별이 뜨고, 다시 해가 뜨는 아침이 오면 내일이 온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보고 날씨가 더워서 정신이 이상해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하루살이’와 헤어지고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고 지냈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다시 만나서 놀자.”그러자 ‘메뚜기’는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 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의심하고 쉽게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시며 천국과 지옥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참된 양식, 생명의 양식에 비유하신 영생과 천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 66절에 보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제자’라는 의미는 ‘12제자’를 의미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무리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상당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제자들은 본문 60절에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렵다’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이 의미는 ‘말씀이 어려워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니고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자신들의 상식과 생각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수님 믿었던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 다른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면 한 자리라도 찾이할 수 있을까 생각해서 자신들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라며 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세상의 기적, 그들의 삶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신 오병이어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모였던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는 보았지만, 그 뒤에 있는 부활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루살이’ 같이 눈에 보이는 고난만 보았지, 그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솝 이야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마리의 ‘송충이’가 땅을 기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머리 위를 찬란한 ‘나비’가 날고 있었습니다. 한 ‘송충이’가 중얼거렸습니다. “야! 친구야! 저 나비는 저렇게 아름답게 하늘을 나는데 우리는 이렇게 땅을 기어다니며 나뭇잎이나 먹고 있으니 우리 팔자도 사납지 않니? 저 나비에 비하면 우리 꼴은 정말 비참하구나” 그러자 다른 ‘송충이’가 말했습니다. “쳐다보면 뭐하니! 속만 상하니 나뭇잎이나 실컷 먹어” 이 어리석은 송충이들은 장차 자기들이 나비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에 분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믿음의 백성을 살아가는 대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 후에 부활과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십자가의 뒤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며 끝까지 주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냉장고가 아무리 비싸고 성능이 좋아도 전기 코드를 뽑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이 상하는 것처럼, 믿음의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성도를 성도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되는 주님의 십자가를 끝까지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2010년 ‘아일랜드’의 ‘밸파스트’라는 지역에서 주민 2,000세대를 대상으로 종교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사 결과를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겉만 기독교인이지 이미 예수님과 끊어져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발표했는데, 첫 번째 그 특징은, 쉽게 예수를 믿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불편한 것을 싫어합니다. 신앙의 부담을 주는 것을 절대 거부합니다.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거룩한 부담, 거룩한 욕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써 살아가기 위해서는 삶속의 거룩한 부담이 있어야 하고, 내 삶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일에 대한 욕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어야 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섬김의 거룩한 부담과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부담과 욕심이 없이 오직 축복만 받는다는 것은 오늘 본문의 예수님을 떠난 무리들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과 끊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속적 욕구에 굴복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씀보다는 삶의 문제가 앞서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은데, 삶의 문제가 먼저입니다. 삶이 전공 필수 과목이라면, 신앙은 교양 선택 과목입니다. 둘 다 잘하고 싶은데 전공 필수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너희도 가려느냐?”라는 말씀을 보면, 이것은 문법적으로 결단과 다짐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세상의 왕으로 예수를 믿고 떠난 제자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살 것인가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뜨겁던지 차갑던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물음에 본문 68절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잡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최고의 소망은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붙잡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루살이’ 같은, ‘메뚜기’ 같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바라보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소망을 품고, 이 땅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제목: 믿음의 성도에게 있는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온전히 감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중보 기도🙁: 지도자들) 담임 목화자/교역자/목자/서번트/사역팀장들의 성령충만과 강건함을 위해 기도합시다. 각 가정의 부모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의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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