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3 요17-27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2022.04.14 14:51

예수인교회

조회 수487

탈무드의 격언 중에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커피나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일 때,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보고 지나가지만, ‘왓츠(Watts)’라는 사람은 끓는 주전자를 보면서 증기기관차를 본 것입니다. 번개가 칠 때 사람들은 놀라서 숨지만, ‘플랭크린’이란 사람은 그 번개에서 어둠을 밝혀주는 전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쥐를 보면 소리를 지르고 도망가지만, ‘디즈니’는 그 모습에서 미키마우스를 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똑같은 것을 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인 바뀐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를 본다고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내 것이 되고, 십자가의 사건이 나의 구원의 사건임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번째로 우리가 붙잡아야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넘겨받았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넘겨 받았다”라는 뜻은 “영접하다, 환영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 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게 예수님을 넘겨 받을 때, 환영하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똑같이 쓰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외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며 예수님을 찬양 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3절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라고 할 때 “맞이하다”는 단어입니다. 바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 앞에 직면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과연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에 그들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는 함께 하면서, 고난의 자리에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도망쳤던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으로 왕으로써 오시는 예수님, 기적의 능력과 힘을 가진 예수님은 바라보고 따르고 있지만, 정작 십자가의 예수님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내 삶에 축복은 좋아하지만 예수님 앞에 헌신은 싫어합니다. 물질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십일조를 내는 것은 삶이 어렵다고 합니다. 내 삶에 손해가 되고 힘든 것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능력과 축복만을 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영광도 없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를 반대하다 순교했던 ‘본회퍼 목사님’은 순교의 순간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값싼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니라, 값비싼 십자가의 복음을 믿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영광도 있지만, 내 삶에 감당해야 할 고난도 사명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9~30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번째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양 옆에 두 명의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이들을 ‘강도, 행악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들을 예수님 양 옆에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 양 옆에 행악자, 강도들을 함께 십자가 처형을 함으로써, 예수님도 이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하고 변질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이,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주님의 십자가를 왜곡하고 축소하고 변질시키려 해도, 십자가는 변질되지 않고,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그 은혜와 능력이 더 크게 증거되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9절부터 22절을 보면 빌라도가 마지막 양심을 가지고 죄목을 쓰는 명패,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적은 명패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기록합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은 예루살렘 성에서 가깝고 그 때는 세계 각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끔직한 현장을 지나면서 그들이 본 것은 “유대인이 왕 나사렛 예수”의 죽음, 자신들이 소망하며 기다렸던 메시아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히브리 말과 로마 말과 그리스 말’로 썼는데 이 세 가지 언어는 당시 로마제국이 사용했던 모든 언어로, 이 뜻은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백성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사탄의 세력이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감추려 하고, 왜곡하려 해도, 주님의 십자가는 그 악한 행동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어떤 상황과 사탄의 방해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시작도 못하고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 능력으로 그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자신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내 삶을 맡기면 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십자가의 은혜의 삶으로 이끌어 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9절, 30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은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내 삶을 맡길 때, 그 삶은 이제 내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제목: 내 삶에 성령의 영을 부어주시어 십자가의 은혜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내 삶에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소서

중보 제목: (목: 지도자들) 담임목회사/ 교역자/ 목자/ 서번트/ 사역팀장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각 가정의 부모들을 위해서, 새로 선출된 대통령 당선자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댓글 쓰기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