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oss 3  요1:43-51  주님이 나를 부르실때

2022.03.18 08:57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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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oss 3  요1:43-51  주님이 나를 부르실때  찬324/통360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십자가로 부르십니다. 특별히 빌립과 나다나엘을 통해 어떻게 부르시는지 그 3가지 음성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주님이 나를 부를때 “나의 일상에서 부르신다.” 43-44

43절에 다음날 예수님은 집앞에 있던 빌립을 불렀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문장은 당시 유대 랍비들이 제자를 콜링하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특별히 44절에 벳세다에게 부른 사실을 주목합니다.(44절) 벳세다란 “어부들의 집”으로 제자들이 살았던 집, 일상에서 부르셨다는걸 말합니다. 이걸 통해 몇가지를 묵상해보면 하나는 “주님이 일상에서 부른다”는 점입니다. 교회에서만, 수련회에서만, 훈련중에서만 부르는게 아니라 일터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운전중에도 부르신다는 점입니다. 한 성도가 직장에서 일하며 지루하게 한 노인을 상대하는데 갑자기 주일에 받았던 말씀이 떠올랐답니다. 행복한 길을 위험한 사람과 걸으면 위험할수있지만, 위험한 길을 안전한 사람과 함께 걸으면 안전합니다.” 그러면서 “너는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정신차리고 그분을 잘 상대해 드렸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상속에서 만나십니다. 왜냐면 우리의 일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주님을 따르도록 부른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정확히 보십시오. 나를 따라오너라” 이것은 유대 랍비들이 오랫동안 제자들을 지켜보다가 한명의 제자를 선정하여 콜링하는 대사입니다. 이때 기준은 “나의 철학과 신념을 그대로 따르는자”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은 분명했습니다.나를 따라오너라” 그런데 우리는 처음엔 따르는듯 하다가 점점 예수가 아니라 “나 자신”를 따라갑니다. 예수가 원하는곳, 원하는 일,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곳, 원하는 일, 원하는 사람을 찿아다닙니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이 엇갈립니다. 빛을 가장 잘 반사하는것이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거울은 속이지 못합니다. 내가 왼손을 들면 왼손이 움직이고 오른손을 들면 오른손이 움직입니다. 100%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거울이 아닙니다. 주님의 삶을 잘 반사하려면 거울과 같은 순종이 필요합니다. 처음만 멋모르고 쫓는게 아니라 계속 쫓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일상속에서 이 부름앞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둘째 주님이 나를 부르실때 “선입견을 버려야 합니다.” 45-46

    예수님의 부름앞에 순종했던 빌립은 곧바로 나다나엘에게 전도합니다. 그런데 그는 몇가지 선입견으로 예수의 콜링을 무시합니다. 그 하나는 “예수가 아니라 빌립이 불렀다는 점입니다.” 빌립은 당시 최하층의 어부였지만 나다나엘은 학식있고 진지하며 사색을 즐기는 지식인이었던걸 알수있습니다.(45절) 그러다보니 자신보다 부족하고 메시야를 잘 모르는 빌립이 자신을 부르는데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순종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이 머리를 풀고 나타나서 직접 육성으로 말씀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 일상에서 배우자나 자녀나 나보다 더 못한 친구를 통해서 부를 수 있습니다.(마25:40) 문제는 그럴때 사람의 말로 받아서 거부할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예배자 다윗도 밧세바를 범했을때 선지자인 나단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는데도 전혀 주님의 음성인줄 모르고 엉뚱한 대답을했습니다.(삼하12:7) 오늘도 주님이 누구를 통해 부를지 모릅니다. 누가 부르던 “아멘”으로 화답합시다. 또 하나는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이었다는 점입니다. 나다나엘은 단번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것은 나사렛을 무시하는 말투면서 동시에 그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유명한 예루살렘이나 예언된 베들레헴에서 나타나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표현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사회를 살면서 고정관념이 많습니다. “손님이 없는 식당은 맛이 없다.” “직장이 작으면 미래가 없다.” “가정환경이 안좋으면 자녀도 안좋다?” 등등 그래서 사람을 뽑을때도 이력서의 경력만 보고 사람을 뽑을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인류를 변화시킬 12명의 제자를 가난한 갈릴리 벳세다에서 불렀습니다. 모세는 왕궁이아닌 미디안광야에서, 다니엘은 포로였을때, 다윗은 양치고 있을때 불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전도해야 할까요? 이사람은 될거야, 안될거야? 판단하기보다는 주님이 마음을 주셨을때 다가가 “와보라”라고 선포합시다 오늘도 선입견을 버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복음을 전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주님이 나를 부를때 “나를 알고 부르십니다.”  47-51

   놀랍게도 나다나엘은 선입견을 이기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 놀라운 음성을 듣습니다.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참 재미있는 대사입니다. “도데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언제봤다고 그가 진실한 사람인지 거짓말장이인지 판단했을까요?” 그이유에 대해 48절에 말씀해주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이 말을 해석하려면 유대인들과 무화가 나무의 전통을 아셔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집구조는 거실과 주방과 방의 구분이 없었기에 요리를 하다보면 냄새나 연기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해 주로 뒷뜰에 심어놓은 무화과 나무아래서 깊은 사색이나 율법의 말씀을 묵상하곤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나다나엘이 메시야를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했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자신의 죄성을 고백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던 나다나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을 예수님이 알고 있는걸 듣고는 깜짝 놀라며 단번에 엎드리면 고백합니다. 49절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부름앞에 엎드립니다. 이 감동적인 부르심의 장면을 보면서 두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주님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론 집에서 이 작은 화면을 켜놓고 기도하는게 무슨의미가 있을까? 남들다 대충사는데 궂이 거룩하게 살필요가 뭐있나? 아무도 안보는데 좀 속이면 어떤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실하게 살아가려는 몸부림과 노력을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오늘도 진실한 삶을 주님앞에 사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더 큰 걸 주려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나다나엘 예수님이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님을 인정했지만 주님은 그것 때문에 부른게 아닙니다. 51절을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인생의 진정한 메시야, 구원을 경험하며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땅을 살지만 하늘의 삶을 살게 되는 더 크고 신령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는걸 알려주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단순한 문제해결이 아니라 신령하고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사순절 기간 더 큰 은혜를 사모하며 나갑시다.

   

기도제목: 오늘도 나를 부르시는 주님앞에 그음성을 듣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음성을 들었다면 주님의 제자로 아멘할수있는 믿음이 있게 하소서, 오늘도 맡겨주신 영혼들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중보제목: (금:선교지/ 모든예배/ 사순절 위해) 11개의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중보합시다. 주일/새벽/목장예배들을 중보합시다./ 사순절기간동안 십자가를 깊이 체험하며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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