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4  엇갈린 마음  욘4:1-11  

2022.02.18 08:24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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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4  엇갈린 마음  욘4:1-11   찬 455/ 507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요나서는 전체가 엇갈린 마음 투성이 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하는데, 요나는 스페인을 향합니다. 요나는 잠을 자는데, 불신자 선장이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흘동안 외치길 바랬지만, 요나는 하루를 외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살아나는데, 요나는 죽여달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자꾸엇갈릴까요?

첫째 요나의 삐뚤어진 마음 때문입니다.  1-4

  1절에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로 요나는 화가 나서 스스로 죽여달라고 말합니다. 왜그런걸까요? 그는 여전히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그가 생각한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는 사랑이 많은 분이기에 니느웨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것이 화가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연한 일을 한건데 왜, 요나는 이토록 분노하는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이스라엘에 대해서만 그런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것입니다. 다른 이방족속이나 미워하는 사람들은 제외시킨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좁은 소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동시에 온 열방과 우주의 하나님임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가 많은 가정에서도 일어납니다. 대게 막내가 사고를 치고 잘못해도 부모는 용서해주고 다시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왜 잘못했는데도 감싸주는가?” “노력도 하지 않는 막내에게 왜 돈을 주는가?” 부모의 입장을 이해못합니다. 눅15장에도 똑같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집안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멀리서 뛰어나와 새마포옷을 입히고 집안의 주인을 상징하는 금가락지를 끼워줍니다. 반면 집안을 돌보고 재산을 지켜온 형은 그런 동생과 아버지가 못마땅하여 들어가지도 않고 분을 냅니다. 이것이 지금 요나의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이것에 대해 하나님은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이 말은 “너의 분노가 이치에 맞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종이 주인에게 원망하는게 맞냐?”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은 우리도 지체에 대해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세히 들어보면 주님의 이 음성이 들릴것입니다. “너의 삐뚤어진 마음이 옳으냐?”

   여기서 “화내다”는 원어는 “죄악”이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욘1:2 …니느웨의 죄악이 내앞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과 같은 단어입니다. 즉 요나가 이방인형제를 이해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나, 니느웨사람들이 지은 악함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같은 죄악”이란 의미입니다.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우린 범죄나 도둑질만 나쁜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고 바보라고 놀리는것도 살인죄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요일3:15) 회사나 교회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요나의 마음이 생길때가 있습니다. 마귀는 이걸 당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당연한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자주 말다툼을 합니다. 그럼 다투었던 두명을 불러다가 혼을 내면 둘다 자기입장을 설명합니다. 들어보면 둘다 말이 됩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혼나는것은 “형제간에 싸웠기 때문이다.” 성경은 “형제는 사랑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한 부모를 둔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손과 발이 싸우고 눈과 귀가 싸운 꼴입니다. 마귀는 온 인류를 이런식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이것을 위해 흘린 피였습니다. 오늘도 배우자를 바라볼때 지체들을 바라볼때 탕자를 못마땅해 하는 큰형의 삐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걸 위해 기도합시다.

째 요나의 삐뚤어진 사랑 때문입니다  5-11

  사랑이 삐뚤어지면 엇갈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요나는 자기민족을 너무 사랑해서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이 된것입니다. 내 자식을 사랑하면 남의 자식이 보이지 않는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는 5절에 이 상황이 못마땅하여 성읍을 한발짝 나와서 근처에 초막을 짓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초막은 작은 그늘을 만드는 천막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에겐 출애굽을 할때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해야 할 장소에서 미움이 가득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 보자”라는 오만한 마음으로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교회와 목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감사하는 초막입니다. 근데 간혹 맘에 들지 않거나 상처를 입으면 우린 한발짝 뒤로 물러나 지켜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요나의 마음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박넝쿨을 자라게 하셔서 그늘로 시원케 해줍니다. 근데 다음날 동틀때 벌레한마리로 박넝쿨을 갈아먹게 하셔서 말라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자 뜨거운 동풍을 요나에게 불게하여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자 요나는 또다시 하나님께 화를 내면서 죽여달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박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두번째 반복해서 그의 삐뚤어진 악함을 지적합니다.(9절) 이것은 두가지 요나의 완악함을 지적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는 요나의 불순종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풍랑과 큰물고기와, 박넝쿨, 벌레, 해, 동풍등 온천하 만물이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걸 보여 주는데도 요나만 못마땅하여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삐뚤어진 사랑의 모습입니다. 니가 밤새 자란 박넝쿨 하나를 사랑하여 이렇게 아까워 하는데, “왜 좌우분변 못하는 십이만명의 니느웨 사람이 죽어가는걸 이해 못하냐?”입니다.(10-11절) 아이들 학교에서 발표회를 할때 부모들은 자기애들의 순서가 되면 기를 쓰고 사진찍고 박수치는데 자기 아이가 끝나면 맨뒤로 가서 딴짓합니다. 그리고 지루해 하다가 끝나기도 전에 가버립니다. 발표회 전체가 무엇이고 다른 아이들이 뭘했는지는 안보입니다. 목장모임을 할때도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들 나눔때는 온통 난 뭘 나눌까 생각하며 집중하지 못하다가 내 나눔을 할때만 집중합니다. 그리고 내순서가 끝나면 화장실을 가거나 심지어는 다른 일 보는 분도 계십니다. 사역을 할때도 자기일에만 집중한 나머지 예배가 시작되도 모르는 분이 계십니다. 간혹 내상황만, 우리집만, 우리목장만, 우리 교회만,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배타적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배타적 사랑은 사랑하면 할수록 삐뚤어집니다. 우리에겐 죄인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이타적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 마음을 갖으려면 성령이 부어져야 합니다. 행 1:8 “오직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만 아니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요나는 우리의 삐뚫어진 자화상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정말 되물어 봅시다. “니가 화를 내는것이 옳으냐?” 니가 슬퍼하는것이 옳으냐, 니가 안타까워하는것이 옳으냐” 스스로 질문해볼수있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개인기도: 하나님 오늘도 우리의 사랑이 내앞에 그늘을 만드는 박넝쿨에 머물러 있습니다. 나의 지경이 미워하는 니느웨까지 나갈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와 사랑을 충만히 채워주소서 주님의 사랑을 더깊이 깨닫게 하소서

중보제목: (금:선교지와 모든 예배) 11개의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중보합시다. 주일예배, 새벽예배, 목장예배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더깊이 알고 밸리와 남가주와 열방을 품는 예수인들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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