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ise the Lord 9 시9:1-20 눈물이 찬송이 되는 삶
2026.10.27 07:08
예수인교회
Praise the Lord 9 시9:1-20 눈물이 찬송이 되는 삶 찬21/ 통21 다 감사하여라
오늘의 시편도 내용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시로, 원문을 보면 9편과 10편이 하나의 시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유는 번역본들을 찾아보면 한편으로 기록되었고, 타이틀이 9편에는 있는데 10편에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9편과 10편이 알파벳시로 묶여있습니다. 알파벳시란 시의 첫스펠링을 알파벳 순서대로 표기한 것입니다. 가령 한국말로 가나다라 순서대로 시를 쓴거죠. “가느다란 손, 나지막한 여운, 다듬어진 머리결,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이런 형태란 것입니다. 9편에서 10편까지 총 38절인데 히브리어 스펠링이 22개입니다. 즉 거의 2절씩 히브리어의 스펠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알파벳 순서로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외우기 쉽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많은이들에게 불려진 노래란 거죠. 근데 왜 많은 이들이 불렸을까요? 오늘 타이틀에 뭇랍벤에 맞춰진 노래라고 쓰였습니다. 뭇랍벤이 전체 시편중 여기만 나오는데 번역하면 “아들이 죽어서 부르는 노래”란 의미가 있습니다. 얼마나 비통하고 슬플까요? 인간의 슬픔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은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극한의 슬픔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마친다는 것이 이 시의 핵심입니다.
첫째 눈물이 찬송 되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1-8
시9: 1 주님, 나의 마음을 다 바쳐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놀라운 행적을 쉬임 없이 전파하겠습니다. 개역개정은 전심이라고 햇는데 새번역이 “나의 온마음”으로 잘 표현했죠. 온마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전파한다?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럴려면 두가지 의지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그렇게 찬양하는 삶이 되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말했지만 이시는 뭇랍벤의 시입니다 가장 비통하고 슬픈시란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이 와도 무조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결심의 노래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으로 찬양하면서 기쁨과 감사가 생기는걸 기대하는 것입니다. 가령 자녀가 시험에 떨어졌어도 하나님 조금더 준비할수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또다른 계획을 준비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때 마음에 기대와 소망이 생기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찬양은 감옥의 문을 열고, 감사는 사탄의 무기를 무력화 시킨다”고 했습니다. 중요한것은 시편의 기자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적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전파하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찬양하고 전하는가입니다. 그게 3-8절까지 기록된 말씀들인데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시9:3 주님 앞에서 내 원수들은 뒤돌아서 도망쳤고, 비틀비틀 넘어져서 죽었습니다. 얼핏보면 내 원수들이 벌받고 망하는걸 보며 기뻐하는 것처럼 나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4-8절까지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공의와 심판”입니다. 즉 본문의 기자는 원수가 넘어져서 기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믿기 때문에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이유가 뭐죠? 공의로운 하나님을 보는게 아니라 날마다 원수가 넘어지나 안넘어지나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아시죠. 당연히 토끼가 이겨야 맞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이 거북이가 이깁니다. 왜죠? 토끼는 결승골을 보지 않고 거북이만 쳐다보며 가니까 진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만나도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려면 대적이나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선하시고 공의로우심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부른 찬21장의 다 감사하여라 라는 찬송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놀라운 것은 이 찬송이 독일의 에일렌부르크의 린카르트목사님이 마을 성도들과 불렀던 찬송인데 당시 30년전쟁 독일전쟁과 기근, 그리고 페스트질병으로 온마을전체가 비극적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목사님이 1년간 집례한 장례식만 4천건이 넘었습니다. 이런 절망속에서 놀라운 감사와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질수있었던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상황보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며 온종일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시길 바랍니다.
둘째 눈물이 찬송 되려면 “구원자 하나님을 보십시오” 9-20
9-20절까지 반복해서 9,12,18절에 등장하는 단어가 억울한자 가난한자 입니다. 그리고 9,13,14 이끌어내다 구원하다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거나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등장하는 억울한자 가난한자 궁핍한 자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물질이 없는자만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없는 철저한 결핍의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노약자, 또는 갈곳없는 나그네로도 표현됬습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의 진짜 서러움은 돈없고 힘없는 부족함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렇게 불쌍한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것은 바로 구원자일 것입니다. 한국에 가보면 일명 자살다리로 불리는 다리가 있습니다. 마포대교입니다. 1년에 약 1300명이 자살을 한답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다리를 생명의 다리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상담학자들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이곳 난간에 수많은 문구들을 이런 문구를 적었습니다. “밥먹었어? 잘 지내지? 오늘 하루 어땟어? 별일없었어, 많이 힘들었구나, 말 안해도 알아, 커피한잔 어때? 힘든일은 모두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런 문구가 계속 써있는데 잘 들어보면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내옆에서 나와 함께 걸으며 나를 끌어내주려고 힘쓰는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상상하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되는거에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힘든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유일한 차이가 뭐라고 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란 점입니다. 놀라운 은혜죠. 다윗은 인생속에 수많은 위기와 함정, 배신,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평생 잊지않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변함없이 항상 그를 구원해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우리가 바닥을 칠때 그 바닥이 하나님의 손바닥임을 알게되는 것이 은혜이다” 말했습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말씀하나가 추가됬습니다. 시9:16 주님은 공정한 심판으로 그 모습 드러내시고, 악한 사람은 자기가 꾀한 일에 스스로 걸려 드는구나.(힉가욘, 셀라) 힉가욘이란 음악으로 말하자면 쉼표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구원자임을 감사하며 고백했다면 잠깐 멈추며 나지막하게 마음에 새기며 조용히 부르는 구절인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은 악인의 꾀에 스스로 넘어가게 만드시는 분이란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홍해앞에서 오히려 대적들이 죽었고, 여리고를 보호하는 성벽이 오히려 여리고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하만도 제 꾀에 넘어갔고, 다니엘을 모함했던 총리들도 그랬습니다. 이걸 깊이 묵상해본다면 어떤 억울한 일이나 수렁에서도 큰 위로가 될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벽 예수인 여러분
오늘 하루, 내 힘으로 버티려 낙심하지 말고 내 삶을 건지시는 구원자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입술과 삶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