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 그리스도 41  요10:22-42  주님을 안 믿는 이유

2025.12.16 07:04

예수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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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 그리스도 41  요10:22-42  주님을 안 믿는 이유  찬 324/통360 예수 나를 오라하네

우린 가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을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만 있다면, 주님의 기적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잘 믿겠습니다. 그런데 마24장에 말세에 내가 지극히 작은 자로 우리 주변에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매일 내 삶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내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 기적도 경험하게 하시고 주님의 뜻이 무언지도 보여주지만 우린 오히려 믿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성전봉헌절에 성전의 주인인 예수님이 솔로몬 행각에서 진리를 전하는데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첫째 “답정너 때문입니다.”  22-24

  답정너”란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해”라는 신조어입니다. 답을 정해놓고 신앙생활할때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본문 22절에 성전봉헌절에 예수님이 성전을 다신것은 성전의 주인이 주님임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은 24절에 “당신이 메시야라면 혼란스럽게 하지말고 분명하게 답해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답만 해주면 될것 같지만, 주님은 25절에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면 이들은 이미 마음속에 예수는 “거짓말장이” 또는 “미치광이”라는 답을 갖고 질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답정너”였습니다. 상대에게 의견을 물어보는것 같지만 실제론 원하는 답이 나올때까지 답답하게 합니다. 예를들어 이성교제에 대해 멘토링을 받으러 오는 청년들을 보면 대부분 답정너입니다. 이미 마음이 정해졌는데도 마치 물어보는것처럼 해서 헷갈리게 만듭니다. 안타까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답정너”의 자세로 기도할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미 기도응답에 대해 답을 정해놓고 주님께 묻습니다. 진로를 구할때도, 어려운 문제를 만날때도 언제쯤, 어떤식으로 풀리면 좋을지 이미 정해놨습니다. 그것대로 되지 않으면 주님이 안계시다고 투정부립니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될때도 있지만, 때론 고난일때도 있고, 받기 힘든 징계일때도 있고 심지어는 무응답일때도 있습니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시지만, 내가 정한 답대로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걸 모르면 기도응답을 받고도 시험에 들거나 주님을 원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때 답정너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데로 이끌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때 기도의 응답과 상관없이 믿음은 더 뜨거워질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5-30

  26절에 그런데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아무리 전파되도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내양이 아닐수있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할수있는 이유는 27절에 “내양은 내 음성을 듣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 말씀드린데로 팔레스타인의 양은 목자의 음성을 태어날때부터 듣기 때문에 기억한다고 했죠. 예수님을 이걸통해 내양이냐 아니냐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걸 통해 세가지 사람을 생각해 볼수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 정말 안들리는 사람입니다.” 신기하게도 전도할때 어떤분은 쉽게 인도받지만, 어떤분은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못믿습니다. 이말은 정말 안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할점은 나중에 들리는 분도 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해선 안됩니다. 또 하나는 “주님과 친밀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당시 목자가 자리를 비우면 다른 임시목자가 양을 칠때가 있는데 이때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못듣습니다. 왜냐면 관계하지 않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란 한순간에 만들어진게 아니라 희노애락을 오랫동안 나눈 친밀감입니다. 주님과 인생의 희노애락을 함께 한 사람들이 주님의 음성을 분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목소리가 큰 사람”입니다. 대화중에 자기 생각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은 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내생각과 목소리를 조금 낮춰야 합니다. 그래서 눅9:23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음성을 듣는 주님의 양이 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이 아닌 나를 부인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주님의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31-39

   31-32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참람하여 돌로치려하자 34-39절까지 두가지 변호를 하는데 첫째는 시82:6절을 인용하여 불의한 재판관도 신들이라고 표현했는데 하물며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찌 참람하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38절에 나를 못믿겠거든 내가 한 일과 기적을 보고 믿으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을 보면 메시야가 올때 눈먼자가 눈을뜨고, 억눌린자가 자유케된다고 했던 말씀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일과 사역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신의 뜻과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럴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내가 복음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눅 15장에 탕자를 잃어버린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나간 동생을 찿으러 갈 수 있는 유인한 큰 아들이 있었지만, 그아들은 집안일만 열심히 돌봤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작 아버지의 뜻은 집나간동생을 데리러 가는 것임에도 자기일만 집중한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온통 자신의 가정, 일터 건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몸 내가족 내 사업이 중요하지 않다는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5장에 뭐라고 하십니까 먼저 그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 아버지가 맡아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한계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한쪽을 쳐다보면 다른 한쪽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일과 문제에만 초점이 맟춰지면 주님의 일이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되봐야 부모의 사랑을 깨닫듯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봐야 그 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역으로 부르십니다. 왜죠.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주님의 일에는 일도 관심없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람이라면 나는 죽고 주님의 뜻을 붙들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제목: 주님 오늘도 나를 부인해야 하는데 주님을 부인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님의 뜻가운데 답을 정해놓지 않고 순종할수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소서. 

중보제목: (화:목장/목자/성탄감사 VIP를 위해) 15개의 목장/ 목자/환우/VIP/ 성탄예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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