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세상의 소망 20 전도서 8:9-13 “악인의 가짜 형통”
2025.09.02 07:09
예수인교회
허무한 세상의 소망 전도서 8:9-13 “악인의 가짜 형통” 찬 510/ 276 하나님의 진리등대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떤생각이 듭니까? “아니 악한일을 하고도 어떻게 저렇게 축복을 받지?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그리고 “나도 저래볼까?”라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악인의 형통이 만연해 보이는 허무한 세상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9 나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다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
전도자는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일을 살펴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일중에 특히 권력을 쥔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걸 봤답니다. 여기서 개역개정은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원문을 해석해보면 여기에 등장하는 첫번째 “사람”은 왕을 상징합니다. 즉 악한 왕이 사람들을 해롭게 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자가 이 말을 갑자기 꺼내는 이유는 어제 보았던 2절에 “왕의 명령을 지키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제 권영수 목사님이 이부분을 잘 설교해주셨는데 우리는 보편적으로 지도자들에게 잘 따라야 하는걸 알지만, 그러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일까요?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악한 왕”을 만날 경우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주변에서 이런 왕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회사를 악한 방법으로 운영하거나, 학교나, 사회 공공기관, 또는 국가와 국가사이에서도 불의하고 악한일을 일으키는 지도자들을 쉽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악한왕을 쉽게 볼수있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모두가 죄인이기에 누구나 권력을 쥐면 그 악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보면 당이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법률이 바뀌는데도 계속해서 악함이 반복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세상이 죄의 구조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근본 욕구는 “방향이 빗나간 삐뚤어진 욕망”입니다. 이런 구조속에서 어떤 좋은 법률을 만들든, 선의의 전쟁을 하든, 심지어 남을 돕든, 이런 모든 일들이 전부 자기 중심적인 구조속에 일어나기 때문에 결국에는 완전한 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누군가를 위해 라이드를 해준다고 가정할때 나도 모르게 도와주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거나 실수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도움을 받는 사람도 사소한 것에 마음이 상해서 도움을 받으면서도 기분 나쁠수가 있는것입니다. 사람안에 있는 자기중심적 죄의 구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이런 악한 구조나 악한 왕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를 쉽게 보는 것입니다. 근데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10절입니다.
10 나는, 악한 사람들이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악한 사람들을 칭찬한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악한 사람들이 평소에 악한 일을 하던 바로 그 성읍에서,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한다. 이런 것을 보고 듣노라면 허탈한 마음 가눌 수 없다.
악한 사람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우린 악한사람을 볼때 “하나님은 뭐하는지 몰라 저런 인간 안 잡아가가고?” 이런 말을 종종하는데 이것은 이들의 압제와 통치가 매우 길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이런 사람도 반드시 죽음을 피할수없다는 걸 말합니다. 근데 웃긴것은 악인이 죽은후 사람들은 그를 칭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장례문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장례를 화려하게 하는 것은 축복과 영예로 생각했는데 악한 왕이라도 부와 권력이 있었기에 장례를 화려하게 치르면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의 죽음을 명예롭게 생각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화는 우리안에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기업의 비리로 수조원을 세금 안내고 살다가 각종 비리가 들춰지면서 결국 자살한 기업인이 자살하자 죽기전에는 못된놈이라고 말했지만 죽은이후에는 안됬다고 측은해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장까지 지낸 사람이 각종 성추행과 성범죄가 발각되면서 자살했죠. 이때도 그를 기리며 측은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얼마전 중고등학교때 일진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폭행했던 학생이 훗날 유명연예인이 되었는데 어린시절 그에게 피해입었던 학생들이 신고해서 발각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도 그의 인기와 외모를 보며 오히려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거죠. 우린 이런 경우를 종종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악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를 밝힙니다. 11절입니다.
11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징계가 늦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를 질때마다 하늘에서 번개를 맞는다던가?, 죄에 대한 행위 후 곧바로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우린 절대로 악한 일을 쉽게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끔 아이를 키울때 그 나이에 안맞는 거친말을 하거나 화려한 색시댄스를 추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할때가 있습니다. 그럼 어떤 부모는 귀엽고 어리다는 이유로 웃고 넘어갑니다. 어떤 부모는 잘한다고 박수까지치는 분도 봤습니다. 그럼 아이는 더 버릇없어지겠죠. 죄에 대한 징계가 없을때 죄는 더 커지고 그것을 당하는 사람의 억울함도 커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죄에 대한 징계가 없어 보이거나 뒤늦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죠. 거기다가 더 억울한것은 12절을 보면
12 악한 사람이 백 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되지만
악한 사람이 백번 죄를 지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답니다. 당시 문화속에 오래사는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했습니다. 즉 악을 행하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정말 못된 사람인데 장사가 잘됩니다. 자식이 잘됩니다. 하는 일마다 형통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더군다가 건강해서 오래삽니다. 근데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왜이렇게 질병도 잘 걸리는지 보편적으로 목회자들은 수명이 짧습니다. 악인의 장수에 비해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를 그냥 놓아두는 것 죄를 키워주는 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닙니다. 언젠가 어느 성도가 자기 아이가 학급에서 그룹과제를 하는데 데드라인까지 나타나지도 않고 다른아이들의 수고한걸 가로채서 똑같이 A를 받은 아이때문에 억울해했답니다. 그 성도가 그랬답니다. 괜찮다고 그 아이는 언젠가 반드시 그 결과를 얻게 될거라고 결국 그 아이가 그런식으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다가 결국 대학을 못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것을 그냥 놔두는 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것에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는 놀라운 축복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다 잘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작은 잘못을 행할때도 가슴이 콩닥콩닥, 하죠. 불쌍한 영혼을 보면 가슴아파지고, 전도하고 싶어집니다. 거짓말을 하면 계속 불안합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걸통해서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형통이란 것입니다. 형통이란 내뜻대로 내마음대로 삶이 풀려지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삶속에 이루어지는 것이 진짜 형통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은 형통이 아니라 저주란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앞에서 하루하루 경건하게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진짜 형통이요 축복인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진짜 축복과 진짜 저주를 말합니다.
13 악한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가 하는 일이 잘 될 리 없으며, 사는 날이 그림자 같고 한창 나이에 죽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악인의 잘됨은 절대로 잘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형통이요 축복이란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주변에 악인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 그리고 경건한 나의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때가 많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절대로 축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하루 하루 하나님을 바라보며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참다운 형통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