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인생의 소망 9 전4:1-3 참된 위로자가 있습니까?
2025.08.12 09:24
예수인교회
허무한 인생의 소망 9 전4:1-3 참된 위로자가 있습니까? 찬412/통469 내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한국의 한강에는 “자살대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바로 마포대교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고 해서 자살대교라는 별명이 생겼는데 그곳에 가보면 2.5미터나 되는 난간을 설치했고, 곳곳에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게요” 등의 상담문구나, 상담전화가 75대나 설치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살율을 계속 올라간답니다. 그만큼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며 끊임없이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매우 강조하며 가르쳐줍니다. 본문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온 세상의 모든 억악을 살펴봤다”며 시작합니다. 개역개정은 학대라고 표현했는데 원어는 “아슈크”라고 “억누르다”는 의미입니다. 즉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해아래 다양한 억압을 보았는데 이것은 당시 1차적인 억압이었습니다. 가령 돈 있는 사람이 돈없고 힘없는 사람을 억누른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다양한 억압이 존재합니다. 가령 힘있는 기업가들도 노조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힘있는 남편도 나이들면서 아내에게 버림 받기도 합니다. 부모도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짤리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약자의 정의를 단순히 힘이 약한사람이 아니라 “잃을것이 많은 사람”으로 말합니다. 가령 식품회사가 소비자 몇명이 올린 댓글 때문에 매출이 떨어지면서 주가가 폭락하고 직원을 감축하며 회사가 망한다면 과연 누가 “약자”냐는 것이죠. 그래서 “이 시대는 모두가 억압 받는 시대”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1절에서 좀더 강조하는데, “억눌리는 사람이 눈물을 흘려도,”란 지금 누군가 억압을 받고 있는 실제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억누르는 사람이 폭력을 휘드는데,”란 말그대로 지금 누군가 힘으로 핍박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지금 주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억울하게 남을 괴롭히는 상황을 날마다 보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 일어난다는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표현입니다.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의 핵심입니다. 두번 반복하며 억압과 스트레스 그리고 억울한 일을 날마다 경험하면서도 우리 주변에는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난 한주간에도, 아니 어제만 해도 수많은 억압 또는 다양한 크고 작은 스트레스나 힘든 문제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 그것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이나 소식은 몇가지나 있었습니까?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 주변에 남편과 아내가 있어도, 부모가 있어도, 친구가 그렇게 많아도, 주변에 지인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옆에서 도와주고 일으켜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할때 위로는 커녕, 함께 손가락질을 하거나 험담하며 공조한다는 것이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뭐라고 말합니까? 2절입니다.
2. 그래서 나는, 아직 살아 숨쉬는 사람보다는, 이미 숨이 넘어가 죽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말하였다.
“한마디로 이렇게 사느니 죽는게 더 낫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사람은 위로받고 인정받기 위해 그토록 주변관계를 노력하는데, 정작 위로와 도움이 필요할때는 도움은 커녕 오해받고 손가락질까지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주변이나 연예인들이 자살을 결정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한명의 위로자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더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도자는 3절을 덧붙입니다.
3. 그리고 이 둘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저질러지는 온갖 못된 일을 못 본 사람이 더 낫다고 하였다.
억압속에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게 살다가 죽은 사람보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합니다. 왜냐면 세상에 태어나서 누리는 즐거움보다 태어나면서부터 당하는 온갖 불의와 억울함, 부조리한 일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계산을 해보십시오. 하루를 평균내 볼때 즐거운일이 많나요? 슬프고 걱정되고 스트레스 받는게 많을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아예 태어나지 않는게 나을거라 말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전도자가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염세주의자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걸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해아래 살아가는 인생안에 참된 위로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며 인간이 스스로 위로받고 도움받는 복지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복지가 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지가 잘되는 나라일수록 자살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인간의 죄성과 부패로 인한 한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과연 이런 세상 가운데 진정한 위로자, 참 위로자는 해아래 있는것이 아니라 해 위에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린 힘들때 내 앞에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나를 끌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옆을 보지만 내 옆에 서줄 사람도 없습니다. 뒤를 보아도 밀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를 봐야 할까요. 이럴때 위를 봐야 합니다. 위로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럴때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일찍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로 부터 끝없는 억압과 고통의 날이 지속됬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학대받는 자의 삶이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런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의 억압과 분노와 두려움은 매일 다양했지만 그것에 대한 위로는 오직 한분만을 향하는 것을 볼수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란 점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윗이 왕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 였다는 점입니다. 한결같은 위로가 그의 인생의 말년까지 이끌었던걸 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이렇게 되어지길 축언합니다.
그런점에서 우리 인생에 주신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신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고를 아시고 우리가 당할수있는 모든 억압과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를 친히 위로하시기에 부족함 없는 완전한 위로자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예수를 생각만 해도 큰 위로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도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위를 바라보며 위로부터 시작되는 위로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